김선태의 경제시평

[이코노뉴스=김선태 편집위원]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에게 유명한 서곡들이 많지만 대표작은 아마 16시간에 걸쳐 펼쳐지는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일 것이다.

▲ 김선태 편집위원

개인사적으로 그는 이 대작을 통해 자신을 끝없이 좌절시킨 베토벤의 벽을 가까스로 넘어선 듯이 보였다. 그런데 바그너는 열렬한 반유대주의자였다. 후일 히틀러는 파시즘의 선구자로 그를 추켜세웠으며, 때문에 바그너의 서곡들은 아우슈비츠 광장을 가득 메운 채 장엄하게 울려 퍼진 대학살의 반주곡으로도 기록된다.

니벨룽겐의 노래, 곧 신과 악마의 대결을 넘어 살아남은 인간 승리의 진군가는 산업혁명으로 만개된 자유주의 물결을 반영한 것이라고 사학자들은 말한다. 동시대인으로 바그너를 열렬히 지지했던 칼 마르크스는 그 장엄한 서사에서 대공업의 질풍노도를 연상했을 터이다.

바그너가 오페라 극장에서 막 부흥하는 자본주의의 생기를 느꼈다면, 푸치니(1858~1924)는 대규모 빈민가를 배회하며 작곡의 소재를 찾아다녔다. 그가 1896년 발표한 ‘라 보엠’만큼 청중의 가슴에 자신이 본 현실을 정확하게 새겨 넣은 음악도 드물 것이다. 가난한 시인과 여인의 사랑, 이별 그리고 비극적인 재회로 이어지는 라 보엠은 푸치니가 느낀 당대 사회상의 압축판이다. 죽음을 앞둔 미미가 부르는 아리아 ‘그대의 찬 손’은 사랑이 가져다 준 애틋한 꿈을 타락한 일상에 파묻어야만 했던 하층 민중의 불가항력을 상징한다.

자본주의의 오작동과 시장의 역동성

19세기 초에 공장들이 세워지기 시작하자 빠른 속도로 성장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를 파괴했다. 수많은 농민들과 빈민들은 더 이상 노동력을 제공하지 않고서는 생계를 유지할 방법이 없는 처지로 내몰렸다. 산업화라는 판도라의 상자에서 인종차별, 매춘, 아동노동과 투기 등 자본주의의 병폐라 불릴 모든 것들이 튀어나왔고, 그 변종들은 오늘날까지 이 체제의 이미지를 혼탁하게 덧칠한다.

불타는 나무 속에서 하느님이 “나의 예언자가 되어라!” 하자 모세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분에 관해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하느님은 모세의 형 아론에게 자신을 설명할 능력을 주었다. 쇤베르크(1874~1951)의 오페라 ‘모세와 아론’은 여기서 모티브를 구했다.

쇤베르크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해야만 하는 모세의 입장을 현대화시켜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 ‘모세와 아론’은 1932년에 발표되었고, 그것은 체제간의 대립, 요동치는 경제, 공황과 전쟁의 소용돌이 사이에서 미래를 내다볼 수 없는 20세기 서구인의 불안한 정서를 반영한 것이었다. 파시즘과 대공황 그리고 이후 소련식 사회주의가 휩쓸고 간 자리에서 공통적으로 작동한 경제 메커니즘이 바로 시장이었다.

애덤 스미스는 본격적인 경제학 집필에 몰두하기 전, 글래스고의 한 클럽에서 “부자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평화와 가벼운 세금, 그리고 정의만 있으면 된다”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주장은 1776년 출간된 『국부론』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당시는 봉건 왕정체제였으므로 ‘경제의 운영자는 귀족과 관료’라는 중상주의 사상이 지배할 때지만, 스미스는 당대 영국에 왕성하게 전개되던 산업혁명에서 판도 변화를 예측했다.

그가 ‘자연적인 질서를 가지는 것’이라 부른 시장이 역전의 주역이었으며, 앞서 언급한 부자 국가의 세 가지 기초는 곧 근대 시장을 발전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인위적 장치였다.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근대 과학의 틀을 세운 아이작 뉴턴이 직전 시대의 영국 과학자였다는 점은 스미스에게 커다란 행운이었다. 자연계에 불변의 법칙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에게 사회에서도 마찬가지 법칙을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고, 그로써 자유경쟁 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시장경제를 발견하기에 이른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1859년 생물학자인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연계의 동물들이 환경 변화에 적응하고 생존경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진화를 거듭한다는 사실을 관찰로써 입증했다. 『자본론』 출간을 준비하던 중 다윈의 학설을 접한 마르크스는 사회에도 같은 법칙이 적용될 수 있다 믿어 자본의 무자비한 경쟁과 진화 본능은 곧 철의 법칙과도 같다고 분석했다. 자본론을 출판한 미국 출판사가 “자본을 버는 방법이 적힌 책”이라고 광고한 것도, 그 대부분의 내용이 “화폐로부터 더 많은 화폐가 창출되는 과정”으로 채워져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마르크스가 고용 증대에서 혁명의 필연성을 발견하고 공황에서 그 계기를 찾았다면,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실업의 증대에서 혁명의 직접적 위협을 느꼈다. 스미스를 계승한 고전학파들은 자유시장 경제가 유지되는 이유의 하나로 완전고용을 들었는데, 이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시장의 자율조절 기능에 따라 고용이 최적의 상태로 수렴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고전학파의 전제를 충실히 이어받는 대신 산업화의 진전에 따른 고용의 증대가 역으로 착취의 증대와 일치하므로 노동계급은 항상 빈곤의 위협에 시달릴 것으로 보았고, 이 때문에 절대 다수 노동계급이 일상화된 빈곤을 떨치기 위해 혁명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서구 체제, 경쟁원리 한계 지닌 채 신자유주의로

케인스는 과잉공급이 지속되면 시장의 자율 조절 기능은 약화되며 따라서 완전고용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경기가 일단 침체기에 빠져들면 장기화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생기는데, 그러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실업이다. 실업난으로 유일한 생계 수단인 직장을 구하지 못한 실업자 군이 길거리로 뛰쳐나온다면 그것이 곧 체제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다. 이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경제 외적인 힘 즉 정부나 독립적인 경기조절 기구가 개입하여 실업률을 떨어뜨리는 것뿐이다. 실제 미국은 1929년의 대공황으로 실업률이 25%까지 치솟았고, 1930년대에는 서구 전체가 20%를 오르내리는 실업률에 시달렸다.

▲ 양대 진영의 대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백악관 회담 장면. 2017년 7월 8일, (사진=미 백악관 홈페이지 캡처)

자본주의 경기 순환의 저점에 해당하는 공황이라는 현상으로부터, 마르크스와 케인스가 끌어낸 결론은 완전히 정반대였다. 마르크스는 그로부터 새로운 체제의 가능성을 보았고 그 과정에서 시장의 존재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르크스에게 시장은 자본주의 발전에 수반되는 파생물에 불과했고, 자본주의라는 목욕물을 쏟아내면 시장 또한 함께 버려지는 찌꺼기였다. 『자본론』 8편 30장에서 “시장은 대규모 공업이 산업자본을 위하여 정복할 대상”일 뿐이라고 설명한 이유가 이것이다.

반면 케인스는 시장의 자생력에 주목했다. 그는 세계적 차원에서 지속되는 주기적 공황과 시장의 불확실성을 자본주의의 핵심 문제로 보았으며 그에 따른 위험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경제사회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는 이 체제가 완전고용을 보장하지 못하고 부와 소득을 임의로, 그것도 불평등하게 분배한다는 데 있다.”(『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1936) 대신 케인스는 자유경쟁 원리가 적절한 외부 개입장치로 보완된다면 경기조절 메커니즘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것이라 주장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케인스는 세계 시장의 보호를 위해 IMF 창설에 나섰고 초대 세계은행의 부총재를 맡았다.

아쉽지만 두 사람 모두 공황의 완전한 해결책을 찾지는 못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사회주의 나아가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제도로 이행할 것이라 주장했지만 이 제도들의 생존법칙을 설명하지 못했고, 케인스는 자본주의의 수정에 따른 발전을 주장했지만 그 핵심이 되는 외부 기구의 개입을 현실화시키지 못했다. 케인스 이후 경제학은 이러한 외부개입을 재정과 화폐라는 두 가지 수단의 다양한 조합으로 정의하려는 수많은 시도들로 메워지고 있지만 여전히 완전고용의 방법은 발견하지 못한 상태이다.

시장 자율성에 기초한 경쟁원리가 스스로 경기조절을 이룰 수 없다는 점은 도처에서 확인된다. 일본은 1991년 부동산과 주식 시장이 붕괴하면서 시작된 경기 침체로 10년 이상을 성장 정체에 빠져야 했고, 남미는 군사통치에서 비롯된 사회적 갈등과 대미 의존에 따른 정부 권위의 상실로 거의 30년에 걸쳐 저성장을 겪어야 했다. 미국 정부는 이런 이유에서 자국 경제를 ‘정부가 개인의 이윤 추구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혼합 경제’로 정의한다. 어쨌든 국내 시장의 위기를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시장을 해외로 확대하는 일이었고, 그 대표적인 시도가 오늘날 신자유주의와 이에 따른 글로벌 경제로 나타나고 있다.

지구촌 경제 위기, 시장 역전의 기회 될 수도

21세기 글로벌 경제는 자유경쟁 원리에 따라 하나로 연결된 세계 시장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각각의 국민 경제를 지구촌 차원에서 단순히 총칭하는 세계 경제와 다르다. 즉 신자유주의는 고전적인 자유경쟁 원리가 국민경제의 틀을 넘어 세계 시장으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신념이며, 이 경우 해당 국가의 정부는 앞서 언급한 스미스적인 의미에서만 존재가치가 있을 뿐이다.

문제의 핵심은 영미 국가들이 일찍이 자국 시장 보호를 위해 취했던 보조금 지원, 국내 산업 및 지적 재산권 보호 등의 조치를 더 이상 개발도상국들이 임의로 취할 수 없도록 만들며, 그것을 자유경쟁이라는 명분 아래 강요한다는 것이다. 이는 본질상 힘을 앞세운 불공정 경쟁일 뿐이다. 이 점을 일찍이 장하준 교수는 이렇게 지적했다. “1980년대 이후 시장에 대한 맹신과 정부에 대한 불신이 조장되었고, 모든 나라가 똑같은 경제정책을 펴야 하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이에 따라 (경쟁력이 없는) 개발도상국들은 대안을 찾을 필요성이 높아졌다.”(문화일보, 2005. 3. 16.)

어쨌든 세계 경제는 초기 산업자본주의를 훌쩍 뛰어넘어 기왕의 분석 틀로는 예측이나 설명이 어려운 구조로 변화했다. 시장의 한계는 도처에서 작동하므로 위기 또한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미국은 해외자본의 유입효과가 사라지는 상황에서 관세와 재정 정책으로 자국 상품의 경쟁력을 회복하려 하지만 그것이 성공할 지는 미지수이다. 유럽 강국들은 저성장과 고실업이라는 고질병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으며 그 배후에서 수십 년간 구축해 온 복지 정책이 충돌하고 있다. 고도성장을 통해 우리나라에 기회와 위협을 동시에 가져다 준 중국은 사회주의 통치 원리와 시장 원리, 즉 정치와 경제 사이의 괴리로 인해 발생하는 불협화음을 메우며 고군분투하는 중에 무역전쟁이라는 거대한 시험대에 올라섰다.

시장 아래 절대 강자는 없다. 노자의 표현처럼 강량자 부득기사(强梁者, 不得其死), 즉 강한 자가 종내 망하는 것은 진리다. 시장을 중심으로 보면 초기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에서 이베리아 반도 국가들로, 다시 네덜란드와 영국으로, 이어 미국이 지존의 자리를 이어받은 과정이 그렇다. 그리고 지금은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체제와 중국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체제가 시장이라는 공동의 전장에서 한 판 대결을 벌이는 중이다. 당장은 근대 시장의 산파인 자본주의가 압도적 우위를 보이고 있지만 미래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지구촌 경제의 온갖 우여곡절 속에서도 세계는 점점 시장을 중심으로 연결되고 결속되어, 결국 오늘날 시장에 연결되지 않은 국가는 존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시장이 세계 경제를 이끄는 객관적으로 유일한 실체이며 그 작동원리가 모든 국가에 유사하게 적용된다면, 그로 인해 각 국가들이 당면한 위기와 기회 또한 공유될 수밖에 없다. 누구에게나 시공간은 동일하게 주어져 있고, 그것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어 현재의 약점을 없애고 미래의 강자로 올라서는 일은 전적으로 개별 국가의 경제 주체에게 달린 문제다. 그 불멸의 시공간이 곧 시장이다.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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