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김미영 칼럼니스트] 나이 든다는 것은 전에 모르던 새로운 감각/통증을 나의 생활에 하나씩 등재하는 것일지 모른다. 아픈 이력은 상처로 몸에 등재되고 통증은 주기적으로 그 종류를 다채롭게 하면서 나의 생활에 한자리씩 차지한다.

▲ 김미영 칼럼니스트

여기 아프고 저기 쑤시고. 내 보기에 말짱한 엄마가 매일 늘어놓는 한탄을 지겨워한 벌인가, 나도 어느 새 여기 아프고 저기 쑤신다는 말을 달고 산다. 내 아이들은 귀담아 듣지도 않으니 지겨워하지도 않는 것이 그 중 다행.

여간해선 감기도 안 걸리고 (보약 포함 일체의) 약 먹는 걸 극도로 피하는 걸로 내 몸 위하는 줄 알았던 나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환절기면 어김없이 감기를 달고 살며 약에 대한 태도가 싹 변했다. (아직 병원에 대해서는 일리히의 가르침, 그러니까 병원이 병을 만든다는 말을 받들고 있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

미국 드나드는 이가 건네준 약을 먹고 눈과 머리의 쪼이는 듯 한 통증이 싹 사라지는 신천지를 경험한 것이 결정적 계기이다.

그 약을 몇 봉 얻어 약쟁이 아편 챙기듯, 테러리스트 비상 챙기듯 항상 지니고 다니며 정작 아끼고 먹지는 않는다. 약을 지니면 든든한 나이가 되었다? 흐흐

눈 가장자리로 불빛이 번쩍 번쩍 지나가 안경이 이상한가, 안경테에 빛이 반사되어 그런가 했더니 자다가 잠깐 깼을 때도 그러더군. 가느다란 실마리 같은 것이 자꾸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느리게 기어간다. 눈꼽이 끼었나 눈을 자꾸 비벼대고 세수를 꼼꼼하게 해야지 다짐도 하고.

나로서는 낯선 감각이라 두려운 마음도 있었는데 검색해보니 이름붙은 사소한(?) 증상인 듯. 치료가 가능하지 않고 걍 적응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 좀 웃프다.

이제부터 눈에 보이는 세상 모습에서 저 희미한 세로 줄은 없는 걸로 치고 봐야 한다니 세상과 나의 만남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 것인가 싶고 새삼 주위 환경을 인간의 감각 기관으로 매개해서 받아들이는 것의 진상을 (원하지도 않았는데) 알게 되는 것이다.

▲ 오드리 헵번의 인생 테이블/뉴시스 자료사진

아줌마 소리가 그렇게 싫더니 이젠 아줌마라 불러 주면 고마울 지경이다. 힐링서예라는 강좌를 갔더니 강사가 날 어머니라 불러 시껍했다. 힐링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상처 하난 확실하게 주는군.

일전에 가전제품 매장 직원이 하도 어머니 어머니 하며 반말 섞어 가며 응석을 부리기에 나 댁 어머니 아니예요 걍 손님이라 부르세요 했는데 계속 볼 서예 강사에게 그렇게 들이댈 수는 없고 조용히 상처를 어루만질 수밖에.

책을 읽어도 늙은 사람 묘사해 놓은 부분이 각별하게 다가온다.

일본 작가의 소품을 봤는데 죽지 못해 연명하며 의사 귀에 죽여 달라고 속삭이는 노인들의 소원이 어느 날 ‘덜컥 하고 죽는 것’이라는 문장이 나와 밑 줄 쫙. 자다가 고이 가기를 바라는 것보다 좀 덜 원대한 것 같지 않아?

헝가리 작가의 소설을 아주 재미있게 하루 만에 독파했는데, 한 여인을 둘러싼 두 ‘형제같은’ 친구가 40년 만에 모여 앉아 그 날의 ‘진실’을 복기하고 심문하는 중차대한 장면에서 나는 이런 문장에 자꾸 눈이 갔다. “그는 세련된 손놀림으로, 그러나 노인답게 허겁지겁 서둘러 먹는다.”

숭고와 일상의 부딪침이어서 그런가? 심금을 울리는군. 여하간 나는 이런 것을 아주 실용적인 가르침으로 인지해 앞으로 식사를 천천히 할 것을 굳게 맹세한다. 노인답지 않기 위해.

▲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정하린 옮김, 글항아리 출간

대놓고 나이듦에 대해 쓴 책들도 여럿 있지만 소설 중간 중간 나오는 이런 묘사나 진술이 마음에 더 와 닿는다. 가령 파커 J 파머의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는 생각보다 실망스러웠다. 지당하신 말씀 가르침 내리는 듯?

친구가 눈꺼풀이 내려 앉아 자꾸 시야를 덮쳐 눈을 찝었단다. 모든 것이 자꾸 내려 앉는다. 어떤 것도 비관의 또 한가지 이유로 다가온다. 부질없고, 헛되고, 마음은 가라앉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중력의 작용이다. 방치하다가는 땅 속으로, 지구의 중심으로 들어갈 판.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우울과 비관은 자연스런 반응이다. 세상은 시원시원하게 나아지지 않는다. 인구절벽이 왔고 사회는 늙어가고 기후는 몹시 색다르다. 너와 나의 다른 신조는 우리의 선의를 이긴다. 자식은 내 맘 같지 않다. 남편은 자꾸 늙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모두 죽는다. 그러니 우울하지 않은 중년이란 형용모순 아닌가. 하등 힘들 것 없는 반사적 액션. 비관은 대견할 것 없다. 우울은 자랑할 게 못된다.

나는 반사적으로 살고 싶지 않다. 하여 오십대 후반 들어 난생 처음으로 인생의 모토 같은 것을 마련했다. ‘중력에 반하여(against gravity)!’ 내가 좋아하는 사진에서 저 오드리 헵번이 활짝 웃으며 뛰어오르고 있다. 엘리의 점프사진.

입꼬리를 위로 치켜 올리고 함박웃음. 땅을 박차고 30센티쯤 공중에 떠 있다. 샌들조차 벗어던지고 치맛자락 휘날리며 네 활개를 활짝 폈다. 눈부시게 유쾌하고 아름답다. 다시 떨어져 내릴 것을 알기에 유머러스하다.

▲ 열정/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솔 출간

나도 뛰자. 중년의 점프가 이카루스의 비상처럼 드높을 리 없고 그러니 처참하게 곤두박질칠 일도 없다. 다만 약간 뛰어 오를 것. 약간씩 웃고 살짝 농담을 던지고 조금 너그럽고 가끔 사치할 것. 그렇다고 헵번스러워지진 않겠지만.

“현재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타협할 줄 알고, 또 이렇게 현명하게 굴어도 삶으로부터 어떤 칭송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네. 자신이 허영심 많고 이기적이거나 머리가 벗겨지고 똥배가 튀어나온다는 것을 알고 감수해도 가슴에 어떤 훈장도 달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해.” 산도르 마라이, <열정>, 173쪽.

※ 김미영 칼럼리스트는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고대, 홍대 등에서 강사로 일했고 학술연구교수를 역임했다.

전공은 현대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로 관련 책과 논문을 여럿 발표했으며 섹슈얼리티 문제도 연구했다. 광우병 사태 즈음에 한겨레신문에 칼럼을 연재한 경험이 있다. [이코노뉴스]

 

저작권자 © 이코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