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 글·사진=남영진 논설고문] 지난 주말 고향인 충북 황간(黃澗)에 천렵(川獵)을 다녀왔다.

▲ 남영진 논설고문

천렵이라면 지금 아이들은 잘 모르지만 농촌, 산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는 향수를 부르는 말이다.

동네서 가까운 앞강이나 냇가에 가서 피라미 붕어 메기 등 민물고기를 잡는 일이다.

이번 여름은 114년 만의 무더위라 시퍼런 강물이 줄어 물이 빙빙 돌아 가끔 익사사고가 나던 강가 바위가 드러나 있었다. 그 위에 녹조가 끼어 어릴 때 소풍가던 ‘월류봉’ 강물이 아니었다.

다섯 살 위의 형은 어릴 때부터 고기를 잡으러갈 때 항상 나를 데려 다녔다. 낚시를 갈 때는 형이 학교에서 오기 전에 수채에서 지렁이를 잡아놓고 고기바구니를 들고 기다렸다.

오후 5시부터 완전히 어두워지는 8시까지 3시간이 강물고기를 낚시하기에 피크타임이었다. 토요일이나 휴일에는 미리 냇물에 나가 돌 밑에 집을 짓고 붙어있는 잠자리, 나방의 유충을 잡아 미끼로 대신했다.

나방유충은 회유성 고기인 피라미, 마자, 돌고기의 미끼였고 지렁이는 야행성 육식 어류인 메기, 빠가사리, 꺾지 등이 좋아하는 미끼였다.

67년 중학교 때 서울에 올라와서야 ‘떡밥’이라는 낚시미끼를 알았다. 떡밥에 쓰인 깻묵은 초등학교 때는 집에서 갈아서 피라미를 잡는 어항 미끼로 썼다.

물론 가끔 콩가루와 번데기가루도 가게에서 살 수 있었으나 값이 비싸서 장독대에서 된장을 퍼서 쓰기도 했다.

시골에서는 잡은 물고기를 고추장이나 고춧가루를 넣어 벌겋게 졸여서 밥반찬으로 먹곤 했다. 이 어릴 때의 버릇이 60대 중반이 된 나의 유일한 취미다. 실제로 조인스나 연합뉴스의 인명사전에 내 취미가 ‘천렵’으로 되어 있다.

▲ 함께 천렵에 나서 친구들이 잡은 고기의 배를 따고 있다.

나의 천렵 주 무기는 어항(복수)과 족대(반두)다. 어릴 때는 유리어항이라 위험하고 비싸서 형이랑 함께 갈 때만 들고 다녔다.

족대야말로 하나는 물밑에 대고 다른 사람은 고기를 모는 방식이라 여러 명이 필요했다. 원래 주 전공은 혼자도 할 수 있는 해머(쇠메)치기다.

형이 대전으로 유학간 뒤인 초등 2-3학년 때부터 방과 후에는 친구들과 미역을 감지 않으면 혼자 물고기를 잡으러 해머를 들고 다녔다. 어릴 때부터 형을 따라 다녀 금강 상류인 집과 학교사이 초강천 물속의 작은 바위와 돌들을 알고 있었다.

고요한 물속의 큰 돌에는 주로 돌고기(사투리 딩밀이)가 들어있다. 물이끼를 먹고 떼로 몰려다니는 이 고기는 사람이 나타나면 돌 속으로 숨는다.

고요한 물이라 이들의 움직임이 보여 몇 군데 큰 돌을 해머로 치면 부레가 터져 곧바로 물위로 떠오른다. 겁이 나면 큰 돌에 떼로 들어간다. 두 번 정도 때리면 4-5마리, 많이 잡을 때는 한 돌에서 13마리까지 잡아본 적이 있다. 그때의 기쁨이란…

물이 빠른 곳에는 꽁치의 민물버전인 ‘쉬리’(사투리 가사리, 여울각시)가 다닌다. 워낙 빨라 흔히 족대로 후려서 잡지만 해머로 잡을 때는 2~3번 때려야 살이 터져 돌 밑에 기절해 누워 있다.

영화 ‘쉬리’에는 쉬리가 안 나온다. 우리나라 특산종이긴 하지만 1급수 고기는 아니다. 여울이 빠른 곳에서 살고 하얀 색깔 때문에 깨끗한 고기로 알려졌지만 한강수계에서는 3급수까지 산다.

▲ 충북 영동군 황간 석천 반야사의 여울.

중학생 때는 여름방학만 기다렸다. 방학 다음날 새벽 용산역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경부선의 중간지점인 황간에 내려가 개학전날 낮차를 타고 저녁에야 서울에 도착했다.

봄날이 따뜻해지면 수업 중에도 바위 밑에 있는 메기의 수염이 흔들리는 것이 자꾸 생각났다. 초등 4학년쯤 되면 선배들은 수제 대나무로 만든 작살질을 가르쳐 주었다.

먼저 물안경을 쓰고 잠수해 1분 이상 바위 밑을 살펴보다 메기나 빠가사리, 꺽쥐 등을 발견하면 물에 올라 바위 위에 놓아둔 작살을 들고 다시 들어가 고기 몸통을 쏘아 잡는 방법이다.

원시 수렵사회에서는 남자들은 산과 들에서 큰 동물들을 잡아 가족이나 부족의 식량을 해결했다.

논, 밭을 경작하면서 시작된 농경사회에서도 동물이나 물고기는 동물성 단백질의 중요한 공급원이었을 거다.

이 전통이 아직도 남아 사냥꾼은 주로 눈이 온 겨울에 총으로 노루 멧돼지 꿩 등 동물을 잡는다. 여성들과 아이들은 강이나 내에 나가 조개나 다슬기 등을 줍고 작은 그물이나 족대, 소쿠리 등으로 작은 고기를 잡았을 것이다.

천렵을 즐기는 이들은 날이 따뜻해지면 어항이나 그물 등으로 고기를 잡는다. 물론 낚시도 천렵의 일종이나 물에 직접 들어가 잡는 게 아니라 물 밖에서 낚시를 던져 주로 붕어를 낚기 때문에 취미생활의 하나다.

천렵은 따뜻한 봄부터 가을까지 즐길 수 있으나 물고기의 움직임이 활발한 여름철에 더 많이 즐긴다. 선비들은 여름철 피서법의 하나로 산수 좋은 곳을 찾아 찬물에 발을 담그는 ‘탁족’(濯足)회와 함께 하기도 한다.

냇물이나 강가에 그물로 고기를 잡아 배를 따서 솥을 걸어 놓고 매운탕을 끓여 먹는다. 초등 4,5학년 때부터 천렵을 할 때 나는 집에서 양은솥과 식은 밥이나 국수묶음, 고추장을 준비해갔다.

초등학교 때 산과 강에서 뛰어놀던 것이 지금의 건강을 만들어 준 것 같다. 4학년 때 교실이 모자라 산위 향교에서 공부하던 때 자연스레 등산을 하게 됐고 형에게 배웠던 해머치기가 지금 어깨 근육의 토대가 됐다. 작살을 들고 잠수하면서 폐활량을 늘여준 것 같다.

천렵이 전통사회의 생활양식이고 놀이여서 옛글이나 야화집에도 많이 나온다. 가장 유명한 천렵꾼은 경기도 마재의 다산 정약용 형제인 것 같다.

같이 천주학을 하다 흑산도로 유배 갔던 형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가 지금도 서해안 어패류를 총망라하는 책으로 꼽히고 있다. 여기에는 어류의 모양과 생태만이 아니라 맛과 요리방법 등도 나온다.

지금도 팔당의 붕어찜이 유명하지만 1973년 팔당댐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다산의 집 앞에 있는 마재여울에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양수리(두물머리)에서 만나 어종도 풍부하고 고기도 많았던 모양이다.

▲ 녹조가 낀 고향 충북 영동 황간의 월류봉.

다산의 ‘유천진암기’(游天眞菴記)’에 천렵에 관한 글이 들어 있다. 다산의 장남 정학유(丁學游)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4월령에도 천렵이 나와 있다.

“앞내에 물이 주니/천렵을 하여보세/해 길고 잔풍(殘風)하니/오늘 놀이 잘 되겠다/벽계수 백사장을/굽이굽이 찾아가니/수단화(水丹花) 늦은 꽃은/봄빛이 남았구나/촉고(數罟)를 둘러치고/은린옥척(銀鱗玉尺) 후려내어/반석(磐石)에 노구 걸고/솟구쳐 끓여내니/팔진미(八珍味) 오후청(五候鯖)을/이 맛과 바꿀소냐.”

‘솔릭’ 태풍으로 물이 조금 불어났으니 용문, 홍천 쪽으로 올여름 마지막 천렵을 가볼까 한다.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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