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미영 칼럼니스트 

[이코노뉴스=김미영 칼럼니스트]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어느 가족’을 봤다.

칸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영화. 태생에 의해 지정되는 가족이 아니지만 가족이랄 수도 있는 가족. 좋아서 모여 사는 것이기에 더 정겹고 더 진짜라고 강변하지는 않는 프로젝트 팀 같은 가족.

아버지의 아버지의 전처, 그래서 할머니이기도 하고 할머니 아니기도 한 이와 살기를 선택한 스무살 남짓 여성이 있다. 아마도 공부나 예술 분야에서 잘나기를 끝없이 종용했을 중산층 부모에게서 숨쉬기 위해, 살아 남기 위해 달아났을 그녀. 이제 계층하강의 위험한 길로 담담히 들어선 이. 그의 생물학적 부모는 자기 딸이 외국유학 가 있다고 말한다.

대여섯 살 여자 아이가 있다. 대체로 관심 없이 내깔려 두다가 가끔씩 제 기분 따라 폭력적인 훈육과 새옷 선물이라는 살풀이 춤을 추는 에미와 살다가, 거의 버려지다가, 어느 추운 날 근처 어느 지붕 아래로 거둬 들여지는 아이.

가족을 선택할 자격이 인정되지 않는 나이의 그 아이는 아주 미약하게나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어느’ 가족에 합류한다. 영화는 그래서 그 아이가 가난하나마 행복해졌다고 호들갑떨진 않는다.

그렇게 엄마가 시퍼렇게 살아 있지만 엄마가 없는 상처받고 어린 여자애들 옆에 늙은 여자와 마흔 즈음의 여자가 있다.

각각의 유사 모녀 커플은 무릎을 베고 눕거나 무릎에 앉혀 꼭 껴안는다. 몸의 근접성, 몸의 겹침이 생물학적 모녀가 아닌 대체 모녀 사이에서 보이는 것이다.(신파를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워 하는 것 같은 일본 감독이 허용하는 정도의 촉촉함으로.)

▲ 영화 ‘어느 가족’ 스틸컷/티캐스트 제공

이 여인 공동체스런 ‘어느’ 가족에 주인공처럼, 화자처럼 끼어드는 두 남자가 있다. 원제의 만비키 가족, 좀도둑 가족은 그들에게서 비롯된 것인가. 그런데 두 남자는 근육질성(masculinity)과 전혀 상관없는, 뭐랄까 남성성을 갖지 않은 이들이다.

한 명은 덜 자란 아이. 소년이지 남자가 아니다. 다른 한 명은 호리호리한 외모에 굵지 않은 음성에 촐싹대는 몸가짐이라 도무지 권위라고는 찾아볼 길 없는 사람. 그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싶어하지만, 할 줄 알고 가르쳐 줄 것이라고는 좀도둑질밖에 없어 그걸 가르치는 남자. 아버지의 법에서 이토록 멀고 모순된 존재라니.

무위도식과 알코올 중독과 폭력의 아비, 아니면 살아 보겠다고 잘 살아 보겠다고 발버둥치면서 제 장단에 보조 맞추지 못하는 자식을 학대하는 아비. 흔한 스테레오타입이다. 그런데 이 남자, 좀 익숙한 현실적인 존재다.

놀고 먹으려 하진 않지만 힘든 공사판 일을 매일은 하고 싶지 않은 이. 부상당한 보상금 받아 한 서너 주 놀고 먹을 생각에 들뜨는 사람. 그러나 좀도둑질로나마 생계를 의식하고 있는 남자.

도박에 빠진 부모에 의해 차 안에 오래 방치되어 죽을 뻔했을 소년이 생물학적 아버지를 버리고 이런 ‘아버지’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머리 굵어 가면서 도둑질하기가 치욕스러워 진 것도 같고 자기 처지를 창피해 하기도 한다. 소년은 한사코 그 남자를 아버지라 불러 주지 않는다. 그리고 거의 일부러 경찰에 잡혀 그 유사가족을 파토 낸다.

그러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같은 배우 릴리 프랭키가 연기한 아버지처럼, 이 아버지는 몸이 가까이 있고 함께 볼을 차고 실없는 우스개를 하고 ‘아들’과 팀 플레이로 삼푸를 훔친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요는 함께 시간을 보내 소년이 살면서 수시로 돌이켜 볼 과거를 만든다.(영화 말미에 소년은 남자 뒷모습에 대고 입엣말로 혼자 아버지라 부른다.)

그 유사 아버지가 가르친 것이 좀도둑질이 아니라 좀 번듯한 것이었으면 좀 쉽게 아버지로 인정받았을라나? 슬프게도 그 ‘아버지’는 자기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이 그것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아버지 노릇도 보고 배우는 것 일테니.

이 여자팀과 남자팀을 가로지르는 것은 비슷한 연배 남녀의 섹스-유사 부부 관계와 소년과 소녀의 유사 동기관계이다. 아무 보장도 강요도 없는 자유롭고 얇은 남녀관계. 전과자인 남자를 보호하느라 모든 책임을 홀로 떠안는 이성적 타산적 의리의 관계. 팀에 끼워 주듯 도둑질에 끼우지만 그게 별로 떳떳치 못함을 알기에 열외시켜 줄 줄도 아는 오빠 동생.

그 가로세로의 관계 정점에 할머니가 있다. 할머니의 집, 할머니의 고령연금, 할머니의 저축. 할머니의 현금(의붓아들 집에 매년 시찰 나가 시크하게 뜯어낸 돈). 어느 가족이 몇 년이나마 지속되게 한 실질적 토대.

물론 어느 누구도 손 놓고 앉아 무위도식하지 않는다.(가난한 이들이 놀고 있다는 얘기는 모르는 말이다. 열대지방 원주민들 게으르다는 말과 같다. 이번 여름 호된 더위를 겪으며 몸을 재바르게 움직이는 것이 몸에 치명적일 수 있음을 깨달은 이가 적지 않을 터.) 다들 돈을 번다.

취약한 여성 노동, 취약한 하층 남성 노동이 꾸역꾸역 벌어 들이는 것으로 그들은 대체로 라면을 먹고 사는데, 할머니가 제공하는 최종 심급의 안전이 없으면 어찌 되었을지.

더욱이 그 할머니는 유세 떨지 않는다. 죽으면 무의미해질 돈이나 집을 내주고 다정한 몸뚱아리들의 복닥거림을 누리는 것이 훨씬 남는 장사라는 것을 아는 현명하고 시크한 여인.

이 영화의 원제인 좀도둑질에 대한 하나의 단상이 떠오른다. 두 소년 소녀 모두 도둑질당한 것이다. “버린 것을 주은” 것이고 죽어가는 것을 살리려다 데려온 것이지만 자유의지 없는 미성년을 데려온 것이니.

▲ 영화 '어느 가족'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지난달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씨네큐브 광화문에서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뉴시스

그러나 적극적 의도적 범죄 행위가 아니라 (측은지심에서의) 수동적 반사적 행위였고 그런 면에서 마이너한, 중하지 않은 도둑질.

‘아무도 모른다’ 보다는 덜 먹먹한 내용이고 결말이다. 소년은 “집에서 공부하지 못하는 아이들만 가는 곳”인 학교에 그럭저럭 잘 적응하는 것 같고, 소녀는 속수무책으로 원래 자리로 되돌려져 있지만 흥얼거리는 노래로 기억하는 한 때의 가족 기억이, 그 어떤 자의식의 싹으로 자라지 않을는지. 그 ‘어느’ 가족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훨씬 나았다.

※ 김미영 칼럼리스트는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고대, 홍대 등에서 강사로 일했고 학술연구교수를 역임했다.

전공은 현대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로 관련 책과 논문을 여럿 발표했으며 섹슈얼리티 문제도 연구했다. 광우병 사태 즈음에 한겨레신문에 칼럼을 연재한 경험이 있다.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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