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진의 청호칼럼

▲ 남영진 논설고문

[이코노뉴스 방콕 글·사진=남영진 논설고문] 태국의 왕궁은 수도 방콕의 북쪽에 있다.

18세기말 현재의 차크리 왕조가 들어선 곳은 지금은 퇴락한 방콕 항구 부근이었다. 당시 일본이나 중국 그리고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지에서 온 유럽의 큰 배가 바다에서 차오프라야강을 따라 올아와 수심이 깊은 이 방콕항에 화물들을 부려 놓아 각지로 날랐다.

클롱 토이(KLONG TOEI), 사톤(SATHON) 지역이다. 창고가 있던 지역엔 ‘아시아테크’라는 체마파크가 들어섰다.

이 지역에 서울의 종로통 같은 팔람시(라마4세, 영화 ‘왕과나’의 주인공) 도로가 있는데 지금도 물류 때문에 트럭이 많이 다녀 항상 막힌다. 오래된 방콕대학교가 있고 바티 칸대사관과 세계적인 회사의 태국 지사들이 자리 잡고 있다. 동남아 전역에서 유명한 마트인 빅씨(BIG-C) 도 있고 태국 제일의 재벌인 3-TV 방송국도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있다.

지난 7월말 이 곳 시리랏 빌딩 26층에 있는 물류회사 CIC(CENTRAN INTL CORP, 타일란드)의 민강식 회장(66)을 만났다. 26층과 27층 두 개 층에 80여명의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는데 태국 여성 비율이 훨씬 높은 게 눈에 띄었다.

민 회장은 처음에는 남녀 반반정도 뽑았는데 성실성은 물론 능률에서도 여성들이 나아 자연스레 여성 직원들이 많이 남게 됐다고 웃는다.

회사의 특성상 수완나폼 국제공항 근처와 남쪽 바다의 산업단지가 있는 라용 등지의 지사 직원까지 300여명이 된다. 관리 직원인 한국인은 대표를 포함해 10명 정도다.

▲ 민강식 회장이 태국 방콕의 시리랏 빌딩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3년 전 2015년 연말에 방콕에 들렀다가 이 회사의 연말 송년회에 초청받아 간 적이 있다. 스쿰빗가 도심에 있는 포시즌호텔 리셉션장에 300여명이 모여 꽉 찼다.

왠 여학생들이 이렇게 많은가 했더니 이날 드레스코드가 교복이라 대학 때 입던 교복을 입고 여러 가지 액세서리를 한 터라 로비에서부터 완전 축제분위기였다.

태국은 대학생들이 교복을 많이 입는데 여대생들이 우리나라 여고생 같은 하얀 블라우스에 까만 치마를 입어 처음엔 고교 교복인줄 알았다.

이날 압권은 민 회장의 태국어 인사말이었다. 20여년 방콕에 살면서도 어려운 태국어를 제대로 못해 영어로 사업을 하다 보니 태국어가 서툴렀다. 그러니 직원들은 회장의 10분여 태국어 인사말에 환호할 수밖에. 아들 병기씨(40)에게 실무를 물려주어 이제는 1주일에 한번 정도 사무실에 나가 뒷방차지가 됐지만 아직도 중요한 결정은 본인이 한다. 잘하는 태국어는 골프장과 식당에서 쓰이는 말 정도.

고려대를 졸업하고 76년 쌍용해운에 입사했다. 당시 한국 대기업들은 확장경영 분위기라 전세계를 무대로 뛰어다녔다.

입사 5년차 대리 진급을 앞두고 사내 창안대회에 뽑혀 82년 4일간 홍콩으로 포상휴가를 받았다. 해외여행이 처음이라 높은 빌딩숲에 어리둥절 했지만 이곳이 다 비즈니스 파트너로 보였다.

밤에는 놀다가 낮이 되면 도심 빌딩로비에 가서 사무실 안내판을 훑어보고 관련 회사명이 보이면 자기 회사(쌍용해운) 영문 브로셔만 들고 찾아가 관계자들을 만났다. 무더위 속에 사흘이나 지하철 두 역 거리 되는 도심의 ‘빌딩치기’를 했는데도 성과가 없었다.

마지막 날 빌딩을 도는데 성과가 없자 안달이 났다. 본사의 담당이사에게 국제전화를 걸었다. 사정을 설명하고 연장을 해달라고 했더니 선뜻 ㈜쌍용 홍콩지점장을 찾아가라고 했다. 물어물어 갔더니 3일치 출장비를 더 주었다.

지금 같으면 ‘겁 없는 쫄다구의 치기’로 비치겠지만 당시 자신으로서는 진지한 도전이었다. 그때는 20여개 회사에 브로셔만 전해주는 ‘성과’밖에 없어 돌아와 동료들로부터 “포상휴가 간 친구가 잘 놀다오면 됐지”라는 질시도 받았다. 그러나 10개월 뒤 J.H.BACHMAN이라는 독일 회사로부터 연락이 와 ‘공든 탑’이 됐다.

▲ 태국 수도 방콕의 프라야 강 앞 건설 현장 모습. 【방콕=AP/뉴시스 자료사진】

10년쯤 회사생활을 하다 독립해 ㈜한국센트란스를 차렸다. 한국화약이 소래포구에 질산타워를 세우는 전 과정을 맡았다. 프랑스에서 장비를 벌크선으로 부산까지 실어와 바지선으로 인천항에 들어오면 자동차로 소래공단 임시물량장으로 실어오는 일관작업이었다.

이 사업을 하고나니 큰 프로젝트에 자심이 생겼다. 마침 92년께 삼성엔지니어링이 태국에 플랜트사업을 시작해 그 에이전트로 방콕에도 같은 회사를 세워 5명의 직원을 파견했다.

92년부터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가 터진 97년까지 태국 비즈니스가 대박이 났다. 방콕만의 마타풋항구로 일본 네덜란드 덴마크 선적의 운송선이 플랜트 기자재를 싣고 들어오면 라용 석유화학단지와 파타야 등으로 큰 트럭에 실어 날랐다. 플랜트 사업의 중개역할과 운송, 물류사업을 맡았다. 큰 트럭이 80대까지 늘어났다. 직원도 150명까지 불어났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아시아의 IMF사태가 홍콩, 방콕으로부터 시작되더니 급기야 98년부터 한국에도 밀어닥쳤다. 국가부도 위기였다. 우리나라 외환, 신한은행도 방콕에서 철수했다.

이 때문에 태국 정부가 서운해서인지 아직까지 이명박 전 대통령까지 방문해 다시 지점개설을 부탁했으나 들어주지 않고 있다. 민 회장은 이 위기를 사업다각화로 극복했다. 태국에 플랜트사업이 줄어들면서 컨테이너화물, 포스코의 코일, 일반화물들까지 취급하기 시작했다.

이후 10년은 회사의 사업이익보다 태국 일자리 창출에 기여한 바 크다. 기존 플랜트 물류사업은 줄어들었지만 일반수송이 늘면서 직원이 배가 늘어 300여명이 됐다.

태국은 노동법이 강해 직원퇴사는 물론 휴가일수, 추가 근로수당 등 소송에 걸리면 거의 회사가 진다. 그래서 가족경영과 자율경영을 일찍부터 시작했다.

다행히 직원들이 열심히 월급만큼 부를 창조한다. 조금의 적자수주라도 총매출액을 늘여 월급을 주면 직원들이 그만치 열심히 보답한다.

4년 전 회사에 합류한 아들 민 사장에게 2년 전부터 회사를 맡겼더니 공격적으로 다각화해 나간다. 두산중공업의 지게차도 수입해 팔고 한류에 힘입어 태국 여성들에게 인기인 한국산 화장품들도 수입해 판매하고 있다.

▲ 태국 방콕의 시리랏 빌딩 26층 사무실에서 물류회사 CIC 직원들이 근무를 하고 있다.

아버지는 플랜트와 물류밖에 몰라 조언을 잘하지 못하지만 회사의 큰 흐름이 바뀌지 않는지 아들의 시험경영을 지켜본다. 이 많은 직원들까지 물려주어 새 사장이 무언가 다른 시도를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집에서 6살, 1살 두 손자 보는 게 일상이다. 둘째 손자를 안고 다니느라 팔이 아플 지경이다. 그 좋아하는 골프도 뜸해졌다. 가끔 필드에 나가면 드라이브 비거리가 줄어 씁쓸하다.

20여 년간 회원으로 있는 공항 근처 타나시티(THANA CITY)골프장의 모든 홀이 다 훤한데 비거리가 매년 조금씩 줄어든다. 20여년 간 함께 다닌 김병태 대학 선배와 돈내기도 뜸해져 대신 랑캄행 옆집의 백상규 사장과 가까운 윈저팍(WINDSOR PARK)에 가끔 나간다.

“신은 인간에게 하나를 빼앗으면 다른 걸 준다.”는 말처럼 골프광 대신 ‘손자바보’가 되어 가는가보다.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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