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 퀘벡=글·사진 남영진 논설고문] 빨간 단풍잎 국기의 캐나다는 왠지 풍부하고 여유가 있어 보인다.

러시아에 이어 세계 2위의 영토를 지닌 대국이지만 인구는 3700만명이 채 되지 않아 남한보다도 적으니 살기에 좋은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농토와 산림, 호수로 이어진 석유가 나는 천혜의 땅이 있다.

▲ 남영진 논설고문

태평양과 대서양, 북극해를 아우르는 바다가 있으니 우리나라로 수출하는 바닷가재, 청어, 대구가 풍부할 수밖에 없다. 1인당 국민소득(GNI)이 5만 달러가 넘는다. 인구 3억2600만명에 국민소득 4만7800달러 수준인 미국보다 여러 면에서 부러울 게 없다.

지도에서 보면 북미 대륙은 미국과 캐나다로만 이루어진다. 남쪽의 멕시코가 있으나 스페인 계통이라 북미 분위기와는 다르다.

미국과 캐나다는 거의 직선인 국경선을 갖고 비자 없이 여권만으로 자유롭게 드나든다. 지난주 캐나다 동부의 최대 도시 토론토와 수도인 오타와, 제2도시인 몬트리올, 퀘벡 등 4개 도시를 다니면서 양국관계의 친밀성을 느꼈다.

친구 결혼식 하객으로 미국 뉴욕에서 9시간 자동차를 몰고 온 친지도 있었고 3시간이 더 걸리는 미국 아틀란타에서 자동차로 왔다가 가는 친척 부부도 보았다.

인천공항에서 에어캐나다를 탔을 때부터 기내 아나운서가 영어, 프랑스어, 한국어로 차례로 말했다. 기내 표지판에도 영어와 프랑스어가 같이 쓰여 있다.

동부의 퀘벡주가 프랑스인이 사는 곳이라 ‘프렌치 스피킹 캐나다‘로 불리는 것은 알았지만 캐나다 전역에서 공용어로 영어와 프랑스어가 같이 쓰이는 것은 몰랐다.

미국과 캐나다는 처음부터 사이좋은 이웃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1776년 미국 독립이후 1866년 미국으로 이민 온 아일랜드인들이 캐나다를 쳐들어간 페니안 침공 때까지 거의 100년 이상 두 나라는 4번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른 가상적국이었다.

토론토에서 토요일인 지난달 26일 성당 혼배미사를 보고 일요일에는 야외 파티장을 빌려 신랑, 신부 친구들과 친지 100여명을 초청한 결혼피로연에 참석했다. 인사를 나누고 음식과 춤을 추는 그 즐겁고 행복한 분위기가 ’7포 세대‘로까지 불리는 우리 젊은이들의 찌든 모습에 겹쳐져 부러웠다.

월요일인 지난달 28일에는 방문객 10여명이 나이아가라 폭포를 방문했다. 먼저 보이는 ‘아메리칸 폭포’ 옆으로 국경다리를 자유롭게 오가는 차들이 넘쳐났다.

5대호의 하나인 이리호에서 떨어진 ‘말발굽 폭포’(HORSESHOE FALL)에서 강을 따라 토론토시가 있는 온타리오호까지 있는 3곳의 다리가 모두 미국으로 가는 국경이었다. 화요일부터 2박3일 현지 한국여행사 투어로 동부 3도시 오타와 몬트리올 퀘백 탐방에 나섰다.

17세기 식민지 초기 남미는 포르투갈과 스페인, 북미는 네덜란드에 이어 영국이 대서양 연안의 13개주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그리고 프랑스도 일찍부터 샌 로렌스강과 허드슨만 사이의 북쪽으로 진출했다.

▲ 영국군에 의해 프랑스군이 전멸당한 캐나다 퀘벡성안의 군사광장.

프랑스는 대서양에서 들어와 샌 로렌스강 입구인 퀘벡에 1608년 성곽도시를 세우고 몬트리올까지 식민지로 만들어 이 지역을 ‘뉴 프랑스’로 불렀다. 프랑스는 150여년간 센 로렌스강을 수로로 삼아 몬트리올시를 만들고, 오타와강으로 들어가 3곳에 파리를 본떠 노틀담 성당을 지었다.

그러나 ‘태양왕’으로 칭하던 루이14세 시대가 지나면서 식민지에서 벌어들인 재화로 루이15세, 16세 시대 귀족들의 사치가 극에 달해 식민지에도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영국은 캐나다 내륙에서 인디언들로부터 비버나 수달 가죽으로 엄청난 돈을 벌던 프랑스 식민지 퀘벡을 빼앗으려고 안달했다.

1756년부터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 각국지에서 벌인 7년 전쟁이 시작됐다. 영국의 제임스 월프 장군이 전함30대에 빨간색 군복의 1만7000명을 끌고 북쪽의 허드슨만으로 상륙해 육지로 쳐들어갔다.

로렌스강의 협곡 위 절벽에 세워진 퀘벡 성벽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여기에 설치된 대포로 대서양에서 들어오는 적군배를 공격하면 쉽게 침몰시킬 수 있었다.

영국군은 이를 알고 로렌스강이 아닌 북쪽 자기들의 요새가 있는 허드슨만에서 대포를 끌고 퀘벡 성벽 북쪽 고지인 아브라함 평원에 다다라 성안에 포탄을 퍼부었다.

9000명의 부대를 거느린 푸른 군복의 프랑스 수비군의 몽캄 장군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성문을 열고 영국군을 공격했으나 7분 만에 패하고 자신도 전사했다.

1764년 패전 후 프랑스는 수도인 파리에서 영국과 파리조약을 맺고 북미를 비롯한 많은 지역의 식민지를 영국에 이양했다. 영국인들은 관공서와 주요 무역소들을 접수했다.

이후 10여년간 퀘벡을 비롯한 캐나다 지역의 700만명에 달하는 프랑스인들에게 가톨릭 신앙을 박해하고 프랑스어를 못 쓰게 하면서 단순 노동자로 전락시켰다.

▲ 2016년 6월 29일(현지시간) 캐나다를 방문한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수도 오타와에서 국회의사당을 바라보며 손으로 뭔가를 가르키고 있다. 【오타와=AP/뉴시스 자료사진】

그러나 10년 후 미국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이 지역 프랑스인들의 동요를 막고자 영국의회는 <퀘벡헌장>을 채택해 가톨릭 신앙과 프랑스어 사용을 다시 허용했다. 1867년 캐나다연방으로 독립한 후에도 영, 불어가 공식 공용어로 사용됐다.

독립전쟁을 벌이기 시작한 미국의 대륙회의는 1775년 프랑스인이 많은 퀘벡주에 영국에 대항해 함께 싸우자는 러브레터를 보냈다. 프랑스계라 호응을 기대했는데 별다른 반응이 없자 1200명이 1775년 12월 얼어붙은 센 로렌스강을 건너 퀘벡주로 쳐들어갔다.

미국은 1776년 건국 후 1812년 다시 캐나다를 침공했다. 유럽 대륙은 나폴레옹전쟁으로 피폐했고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이 승리했지만 캐나다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미군이 몬트리올을 점령했으나 영국군과 현지 프랑스인들이 합쳐 미국군을 격퇴하고 도리어 미국 수도인 워싱턴까지 쳐들어가 대통령궁까지 점령했다.

미국은 휴전을 제안하고 캐나다군이 철수하자 화재로 그을린 대통령궁을 다시 흰색 페인트로 칠해 이후 ‘백악관’(WHITE HOUSE)이라 불렸다.이후에도 미국과 캐나다는 중서부 오리건 지역과 밴쿠버 지역을 두고 영유권 다툼을 벌였으나, 영국이 1818년과 1846년 양보해 북위 49도 국경선으로 오리건 협정을 맺었다.

13년 후인 1859년 국경의 서쪽 끝인 미국 시애틀과 영국의 캐나다 식민지 밴쿠버 사이의 존 후안 제도에서 일이 터졌으나 미국령으로 귀속됐다.

▲ 캐나다 오타와 국회의사당 앞에 새긴 캐나다연방 14개주 기념물.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설마’했던 미국이 알래스카까지 매입하자 위 아래로 미국에 끼인 캐나다를 지키고자 온타리오 퀘벡 노바 스코시아 등 4개주를 합쳐 1867년 3월 자치연방으로 독립시켰다. 이로써 캐나다란 국가가 탄생했다.

이후 미국과 캐나다는 1,2차 대전과 한국전에 함께 참전했다. 그러나 캐나다는 베트남전 참전은 거부했다. 영원한 우방도 적도 없다. 한국전 당사자인 미국과 북한의 대화를 기대해본다.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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