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으로 읽는 오늘의 일본

중국의 ‘난징(南京) 대학살 자료’가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이후 일본의 유네스코 압박이 본격화하고 있다.

일본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하세 히로시(馳浩) 문부과학상은 6일 프랑스 파리의 유네스코 본부에서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을 만나 “(난징 대학살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과 관련) 일본에서 유네스코 분담금 지불을 중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라고 말했다. 일본의 2014년 분담금은 유네스코 예산의 10%에 해당하는 약 43억 엔(한화 약 403억 원)이다.

▲ 이동준 교수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도 이날 기자회견에서 “유네스코의 목적은 분단이 아니라 통합이며 공정하고 투명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면서 “개혁을 위해 무엇이 가장 효과적인지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겠다”라고 밝혔다. 스가가 언급한 “모든 가능성”에는 ‘분담금 지급 정지와 유네스코 일본인 파견 등’이 포함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은 “투명성이 결여돼 있다는 지적에 대해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답했다. 유네스코 사무국은 유네스코는 기록유산 후보 자료가 여러 나라와 관련돼 있을 경우 해당국들 간 사전협의를 의무화하는 등 심사제도 변경 작업에 착수한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유네스코는 지난달 중국이 신청한 난징 대학살 자료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그러자 일본은 학살 희생자가 30만 명을 넘는다는 자료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면서 유네스코를 맹비난했고, 유네스코에 내온 분담금을 끊을 수 있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일본의 이 같은 행보는 돈을 무기로 국제기구를 좌지우지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일본은 우회 전술로서 유네스코의 등재 절차를 뜯어고치려 시도한 것이다.

일본의 이런 행보에는 ‘위안부 관련 자료’만큼은 세계기록유산으로 올릴 수 없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지난달 세계기록유산 등재에 실패한 ‘위안부’ 관련 자료의 경우 한국과 중국이 공동으로 등재를 재추진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네스코의 등재 심사제도가 일본의 희망대로 변경될 경우 한국과 중국은 ‘위안부’ 관련 자료의 등재 신청에 앞서 일본과 사전 협의를 거쳐야만 한다.

일본 정부가 분담금을 무기로 유네스코를 압박하는 것에 대해 일본 내의 여론도 그다지 호의적이지는 않다. 무엇보다 일본 정부의 강압적인 태도가 오히려 난징 대학살 등을 전면 부인하는 듯한 역효과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2010년 중일 역사공동연구에서 일본 측은 난징 대학살 피해자수를 최대 20만 명에서 4만 명, 2만 명 등으로 추산한 반면, 중국 측은 30만 명 이상이라고 주장했다.

일본 측도 “비전투원의 살해와 약탈행위가 있었다”고 인정했는데 이제 와서 그 규모가 과장됐다고 발끈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오히려 피해자를 모독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아사히신문> 11월7일자는 전직 외교관 등의 의견을 소개했다.

무엇을 지키려는지 가치관을 설명해라

오구라 가즈오(小倉和夫) 일본 국제교류기금 고문

유네스코가 ‘난징 대학살의 기록’을 기록유산으로 등록한 직후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이 기자회견에서 “분담금이나 거출금의 지급 정지 등을 검토하겠다”고 발언했습니다. 중국에 대한 감정이 악화하는 가운데 국민감정의 측면에서 유감을 표명한 기분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국내용 발언과 국외용 발언의 구분이 쉽지 않은 요즘에 이처럼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외교적으로 보면 졸렬한 행위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 YTN 방송 캡처

유네스코를 비롯한 국제기관은 나름의 이념을 갖고 보편적인 가치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각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자세는 통용되지 않습니다.

‘난징’의 등록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평화의 요새를 구축한다’라는 유네스코의 기본정신에 반할 뿐만 아니라 유네스코의 존재의의에 비춰보더라도 이상하다라는 형식의 문제제기가 아니라면 가맹국들은 주목하지 않습니다.

이번 문제는 일본과 국제기관 간의 관계설정 문제를 전면에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의 외교가 추구한 국제사회 복귀는 다름 아닌 국제기관으로의 복귀였습니다. 그 출발이 바로 유네스코 가입이었습니다.

일본은 주목받으려 노력했고 경제대국이 된 이후에는 분담금을 많이 내는 나라로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국제기관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이념이 불분명한 가운데 오늘에 이르게 됐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일본이 국제기관에 보내는 인재가 적다는 것입니다. 국제적인 룰을 만드는 실무를 담당하는 일본인은 제가 아는 한 극히 소수입니다. 이번 문제도 만약 유네스코에 많은 인재를 진출시켜 룰 만들기에 관여해 왔다면 다른 결과가 도출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확실히 외국어가 큰 허들입니다. 제가 대사로서 부임했던 프랑스는 국제기관의 본부가 여러 곳 있다는 이점이 있는 데다, 모국어가 프랑스어라는 점을 활용해 많은 인재를 국제기관에 진출시켜 왔습니다.

한국은 국내시장이 좁기 때문에 인재의 해외지향성이 강해 일정 계층 이상은 매우 국제화되어 있습니다. 일본이 이번 문제를 교훈으로 삼는다면, 국제기관에서 활약하는 인재육성을 국책으로 내세울 정도의 과감성을 보여줘여 합니다.

‘난징’에 이어 2년 후에는 ‘위안부 자료’의 등록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보도되고 있습니다. 나는 역사를 직시하는 것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촉매가 되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는 과거만의 언급은 역사가들 간에서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외교의 현장에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유네스코는 세계의 미래와 연결되는 어떤 가치관을 지켜내기 위해 ‘난징’을 등록시켰는지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은 단락적인 논의에 그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세계적인 과제를 해결하는 장인 국제기관에서 어떠한 역할을 해나갈 것인지 전략을 세우는 계기를 만들어 내어야 합니다.

상황에 따라 변화는 ‘생물’

아카시 야스시(明石康) 전 유엔 사무차장

유엔은 세계정부도 세계연방도 아닙니다. 가맹국인 주권국가들이 협력하기 위한 다국 간의 틀입니다. 그러나 가맹국의 이해 대립이 유엔으로 밀려오는 것이 현실입니다.

나는 26세 때 유엔 직원이 되었습니다. 48세에 사무차장이 되어 18년간 4대에 걸친 사무총장과 일을 해왔습니다만, 젊은 시절부터 가맹국 간의 대립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것은 1995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동부의 슬렌브레니차에서 7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살해된 사건입니다. 전후 유럽에서 일어나 최악의 인도적 비극이라고도 할 수 있는 대량살육이었습니다.

책임자로서 현지에 부임한 나에게 안보리 이사회가 채택한 이런저런 결의나 성명이 날아들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병력이나 예산은 승인되지 않았고 명확한 지시도 내려지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 유럽, 러시아가 대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현지에서 활동하는 PKO 요원을 보호하기 위해 10여 차례의 공중폭격을 결단했습니다만, 미국 정부 대표는 내가 지나치게 신중하므로 학살을 초래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지금 ‘난징 사건’의 기록유산 등록을 둘러싸고 일본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는 유네스코는 문화나 교육, 과학을 담당하는 유엔의 전문기관이므로 힘의 정치가 판을 치는 국제정치의 현실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냉전시절 유네스코는 동서 이데올로기 대립의 무대가 되었고, 미국은 유네스코의 ‘정치화’를 비판해 1984년에 탈퇴했습니다. 2003년에 재가입했습니다만, 이번에는 팔레스타인 문제가 제기된다는 이유로 분담금 지급을 정지했습니다.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유엔 직원으로서 중시해온 것은 어떤 사태에 직면하더라도 ‘중립’ 이상으로 강한 ‘불편(不偏)’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난징 사건’의 심사과정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합니다만, 심사의 투명성은 개선될 필요성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담금 지급 정지를 가볍게 언급해서는 안 됩니다. 가맹국이 임의로 결정할 수 있는 거출금과는 달리 전문가위원회에 의한 절차에 따라 국민총소득의 과거 3~6년간의 평균에 기초해 결정되는 분담금의 지급은 가맹국의 의무입니다. 따라서 지급 중지는 국제법 위반에 해당합니다. 주장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의무를 다한 후에 당당하게 주장하면 됩니다.

유엔이나 국제기관은 생물과 같습니다. 가맹국 간의 힘의 관계 등 그때그때 국제정치의 상황에 따라 변합니다.

중국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강해짐으로써 국제정치에서 존재감을 더해가고 있는 반면, 일본의 분담률은 점점 감소하는 추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헌법 전문에서 말하고 있는 ‘명예로운 지위’를 계속 차지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일본은 한 단계 높은 곳을 지향해야

도미사카 사토시(富坂聰) 타쿠쇼쿠(拓殖)대학 교수

‘난징 대학살의 기록’ 등록을 둘러싸고 일본에서는 “유네스코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라든가 “희생자 수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라는 주장이 많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와 국제사회가 이를 이해해 줄지 여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버블 경제기에 ‘은행이 빌려 준다’는 이유로 많은 돈을 빌린 사람이 버블 붕괴 후 막대한 빚을 졌고, 이후에 돈을 빌려 준 은행에도 책임이 있다면서 소송을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재판에서 패한 그는 재판소를 향해 분노했습니다. “유네스코가 이용당하고 있다”고 외치는 사람들과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자기만의 정의나 명분만으로는 통용되지 않는 세계를 전제로 하여 전략을 세워야 합니다.

이와 관련해 중국은 복잡한 명분은 전달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일본은) 중대한 피해를 준 책임을 통감하고, 깊이 반성한다”라는 1972년 일중 공동성명으로 돌아가라고만 주장해왔습니다.

더불어 공산당에 의한 거의 일당독재의 정치체제로 자원의 집중적 투여가 가능합니다. 경제성장으로 국력이 성장해 역사연구에도 힘을 쏟을 여유가 생겼습니다. 난징 대학살의 등록도 상당한 준비의 결과입니다.

중국이 강조하는 ‘30만 명의 희생자’는 확실히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만, 상대국에서 일어난 일을 “없었다”고 증명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사건은 전쟁 중에 벌어진 것이므로 역사를 뒤집어엎어 불리한 다른 사실을 찾는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을 때 유리한 것만이 드러날 것이라고는 단정 짓기 어렵습니다.

중국은 유럽에도 경제적 영향력을 미치고 있고 막대한 미국 국채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유엔에 가입한 1970년대와는 국제사회에서의 중국의 존재감은 완전히 다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어디까지 역사전쟁을 벌일 것입니까.

이번 사건과 관련해 말하면 나는 일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역사전쟁에 에너지를 사용할 정도라면 인도네시아의 고속철도 수주에 자금을 투입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입니다.

국제사회는 현재 살고 있는 일본인을 상대로 난징 대학살을 연상하는 것일까요. 현재의 독일에 대해 나치스를 연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유네스코 등록도 “아, 그렇습니까”라는 식으로 못들은 척 해도 됩니다. “일본의 명예를 되찾자”라는 일부의 주장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일본이 해야 할 일은 아시아의 안정을 위해 보다 높은 단계의 이상(理想)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유럽에서 커다란 모순이 발생하더라도 영국과 독일, 프랑스가 전면전쟁을 벌일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고상한 안전보장’입니다만, 불행하게도 아직 아시아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국이나 한국에 대해 “함께 이상을 내걸자”고 보다 높은 가치관으로 끌어올리는 외교가 일본에 요구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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