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지난 4월 29일은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하이(上海) 훙커우(虹口) 공원(현 루쉰 공원)에서 일본인들의 일왕 탄생기념 행사와 제1차 상하이사변 전승 기념행사 자리에 물통폭탄을 던진 날이다. 1932년이니 올해로 86년 전 일이다.

▲ 남영진 논설고문

이 의거로 일본 상하이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테이지(河端貞次)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육군대장은 부상을 입은 후에 상처가 악화돼 죽었다.

함께 거사하기로 했던 백정기 의사도 입장권을 못 얻어 공원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듬해 중국 주재 일본 공사를 암살하려다 체포돼 감옥에서 죽었다. 그는 이봉창, 윤봉길 의사와 효창공원에 나란히 묻혀있다.

백범 김구 기념관이 있는 효창공원에는 이들 3의사 외에도 이동녕 조성환 차리석 등 독립운동가의 묘와 아직 유골을 찾지 못한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있다.

윤봉길 의사의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은 수많은 세계인들을 감동시켜 조선독립운동에 대한 세계 여론을 완전히 긍정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었다.

특히 중국 대륙의 실권자였던 장제스(張介石) 총통은 윤봉길의 의거 소식에 "2억 중국인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한 사람의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감탄한 뒤 김구 선생이 이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물적 지원을 제공했다.

이 의거는 일본의 중국침략 시작인 만주사변이 발발해 일본군과 중국 군벌군, 한국 독립파 사이에 전쟁이 격화되던 시기에 일어났다. 1920년대 내내 중국 정부로부터 무시에 가까운 푸대접을 받았던 임시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독립군 재건‘과 같은 사안을 놓고 중국 측의 대대적인 협조를 얻게 됐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일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총살한 것이 1911년 중국 신해혁명의 자극제가 되었듯이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연달은 의거가 중일전쟁과 대한독립운동사에도 중요한 분기점이 됐다.

▲ 지난해 11월 3일 서울 종로구 AW컨벤션센터에서 열린 3.1운동 100주년 민족대표보고회에서 한 참석자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요사진 20선 전시를 관람하며 사진을 찍고 있다./뉴시스 자료사진

실제로 장제스는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전후 한국의 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중국인들은 상상도 하지 못한 거사를 한국의 24세 청년 윤봉길이 당당히 해냈기 때문이다. 이 사건 전까지만 해도 만주에서는 조선인들을 ‘일제의 앞잡이'로 여기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만주에서 벌어진 만보산(萬寶山) 사건 때에는 중국인과 조선인의 대립까지 발생했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긴 상하이 사변을 자축하는 일제의 기념 행사장에 한국 청년이 폭탄 테러를 벌이자 중국인들 사이에 조선인을 항일 동지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퍼지게 됐다.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으로 2명이 죽은 외에 주중 일본공사 시게미츠 마모루(重光葵)와 상하이 총영사 무라이 쿠라마츠(村井倉松)는 중상을 입었다.

제9사단장 육군중장 우에다 켄키치(植田謙吉)는 왼쪽 다리를 잃고 해군중장 제3함대사령장관 노무라 키치사부로(野村吉三郎)는 오른쪽 눈이 다쳐 애꾸가 됐다.

이 부상자 2명이 각각 1941년 태평양 전쟁의 시작과 1945년 끝을 알리는 인물이 됐다. 노무라 장관은 예편 후 외교관이 돼 1941년 미국 주재 일본대사로 진주만 공습 직후 대미 선전포고문을 코델 헐 미국 국무장관에게 전달한 사람이다.

▲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서 열린 매헌 윤봉길 의사 순국 추모식에서 의장대가 참석자들 헌화를 위해 국화꽃을 준비하고 있다./뉴시스 자료사진

그리고 한쪽 다리를 잃은 시게미츠 마모루는 태평양전쟁 패전 후 미국의 미주리 호 함상에서 열린 항복문서 조인식에 지팡이를 짚고 나타나 연합군의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 앞에서 서명한 그 인물이다.

이에 앞서 이봉창 의사는 윤봉길 거사 세 달 전인 1932년 1월 8일 도쿄(東京) 사쿠라다몬(桜田門) 도쿄경시청 부근에서 교외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일왕 히로히토(裕仁)를 겨냥해서 수류탄을 던졌으나 불발됐다.

이봉창 의사는 마차 여러 대 중에서 어느 것이 진짜 일왕이 탄 마차인지 몰라 폭탄 하나는 다른 마차를 맞췄고, 그 폭탄은 마차를 끌던 말과 그 말에 탄 근위병에게만 부상을 입혔다. 이 두 의거는 물론 당시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지시와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1908년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에서 5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매헌(梅軒) 윤봉길은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떠나면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휘호를 써놓고 집을 떠나 중국의 칭타오(靑島)로 건너갔다.

칭다오에서 일본인 부부가 운영하는 세탁소에서 일하며 때를 기다렸으나, 만주사변에서 일본군이 승리하자 "죽을 자리가 없어졌다."며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김구와 만나 "이봉창 의사와 같은 일에 써 달라"고 부탁해 “나는 적성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서약을 하고 입단했다.

한인애국단은 1931년 10월 김구가 대일 무장투쟁을 결정하고 상하이에 체류 중이던 민족주의 성향의 청년 80여명을 모아 비밀결사대를 조직해 단장으로는 취임한 조직이다. 여기서 이봉창과 윤봉길이 나왔다.

▲ 윤봉길 의사 상하이의거 86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달 28일 의거 현장인 루쉰공원 매헌기념관에서 관계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제공

이봉창은 훙커우 의거 전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김구와의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자신의 시계와 김구의 낡은 시계를 바꿔 품에 넣고 갔다고 한다.

이 때 “이 시계는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원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니 저와 바꾸어 주십시오. 제 시계는 이제 몇 시간밖에 쓸 일이 없으니까요.”라고 김구에게 한 말이 전해진다. 이 두 시계는 효창공원 내 백범 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현장에서 체포된 그는 1932년 12월 19일 일본 육군 9사단 주둔지였던 일본 이시카와(石川)현 카나자와(金澤) 형무소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나이는 25세. 그야말로 짧고 굵게 살다 갔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는가?"라는 물음에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말할 게 없다"고 답했다 한다. 시신은 봉분도 없이 인근에 암매장됐는데 훗날 김구의 지시로 의열단원 박열 의사가 해방 직전에 수습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인근에 윤 의사 기념비와 총살을 당한 지역이라는 비석이 남아 있다.

86년 전 한국인과 중국인들이 함께 환호했듯이 한반도 통일과 나아가 동북아 평화를 위해 마음을 합쳐야 할 때다. 이번 주말에는 신록에 덮힌 양재 서울의 숲 매헌기념관에 가봐야겠다.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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