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최성범 주필·경영학 박사] 지난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격 침공했을 당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3일이면 침공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터다. 길어야 열흘 정도이면 상황 끝이라고 자신감을 가졌을 게다.

최성범 주필
최성범 주필

다른 나라들이 항의를 해도 신속한 군사작전으로 영토를 점령하고 나면 그만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게 뻔하다. 그도 그럴 것이 2014년 크림반도 점령 이후 국제 제재를 받아 본 경험이 있어서 견딜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어느 정도는 갖고 침공을 결정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의 제재를 경험해 보니 다소의 불편함은 있었지만 견딜 만 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거의 한 달에 육박한 시점에서 푸틴 대통령이 크게 당황하고 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수도 공략과 정권 교체에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우크라이나의 반격이 거세지는 등 전황이 교착 상태에 빠져있는 게 현실이다.

러시아의 자랑이라는 탱크는 우크라이나 군의 대전차포인 미제 재블린(Javelin)의 기습공격에 당해 큰 힘을 쓰지 못하고 있고, 공격 헬기나 전투기도 휴대용 대공무기인 스팅거(Stinger) 미사일에 상당수가 격추돼 제공권도 장악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결정적 전과를 거두지 못한 상황에서 전사자가 7천~8천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을 푸틴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보다 푸틴을 더 놀라게 했고 앞으로 두고두고 큰 영향을 미칠 일은 거의 전세계(중국 등 일부 국가를 제외한)가 동시에 단행한 제재의 강도와 그 범위일 것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의 제재는 경제 금융 등을 포함한 거의 모든 분야를 포괄한다.

가장 강력한 제재는 국제결제망 스위프트(SWIFT)에서의 퇴출이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러시아는 금융거래가 사실상 불가능해지면서 루블화는 절반 이하로 폭락했고 증권거래소는 문을 닫았을 뿐만 아니라 국제 무역이 전면 중단되고 말았다.

러시아는 17일 1차 디폴트 위기를 넘겼으나 러시아의 돈줄인 원유 수출 길도 상당 부분 막힌 상황에서 러시아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이것 말고도 신용평가사들의 신용등급 강등, 주요 증시에서의 러시아 퇴출, 비자 등 신용카드 사용 금지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금융제재가 동원되고 있다. 애플페이도 중단돼 간편결제도 불가능해졌다.

제재는 이뿐만 아니다. 넷플릭스, 인스타그램 등 글로벌 미디어 사업자들도 모두 러시아를 차단해버리고 말았다. 미국 문화의 상징이라는 맥도날드도 영업을 중단했다고 한다. 아마도 전세계의 거의 모든 기업들이 일단 러시아와의 관계를 끊거나 아마도 관계 중단을 모색중인 게 현실이다.

[모스크바=AP/뉴시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8일(현지시간) 모스크바의 루즈니키 경기장에서 열린 크름반도(크림반도) 합병 8주년 기념 콘서트에 참석해 인사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특별 군사작전은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를 대량학살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모스크바=AP/뉴시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8일(현지시간) 모스크바의 루즈니키 경기장에서 열린 크름반도(크림반도) 합병 8주년 기념 콘서트에 참석해 인사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특별 군사작전은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를 대량학살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러시아는 사실상 중세 암흑시대로 회귀했다는 말이 농담이 아닌 지경이다. 온라인 금융도 안 되니 무역은 아예 엄두도 못 내고 스마트폰도 전화말고는 무용지물이 되는 게 시간문제가 아닐 수 없다.

푸틴도 과연 러시아가 이 정도의 상황을 처하게 될 걸로 예상했을까? 국제 금융망을 장악한 미국의 주도로 추가제재를 예상하기는 했겠지만 이 정도의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게 아닐까? 그것은 20세기의 세상과 21세기의 세상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생겨난 판단착오라고 봐야 한다.

20세기말 정확하게는 1990년대부터 본격화된 세계화와 디지털화가 만들어 놓은 세상은 그 이전과는 완전히 판이한 세상이다. 공급망(supply chain)과 판매망 모두 전세계로 확대돼 전세계의 모든 기업과 개인이 전세계를 상대로 부품과 소재, 그리고 상품을 조달(sourcing)해 전세계를 상대로 판매 또는 공급하는 세상이다. 한 나라만으로 아무 것도 만들 수 없기도 하고 모든 것을 다 만들 수도 있는 세상이다.

중국에서 요소 수출을 중단하니 한국의 트럭들이 가동을 멈춰야 하고, 자동차용 반도체 생산이 부족해 현대차 생산 라인이 가동을 줄이거나 중단하는 현실이 단적인 예다.

[하르키우=AP/뉴시스] 14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에서 소방관들이 러시아의 로켓 공격으로 파괴된 아파트의 불을 끄고 있다.
[하르키우=AP/뉴시스] 14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에서 소방관들이 러시아의 로켓 공격으로 파괴된 아파트의 불을 끄고 있다.

반도체 산업의 예를 들자면 미국이 설계하고, 네덜란드와 일본 기업이 제조설비를 만들며, 한국의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대만의 TSMC가 칩을 생산하는 분업구조가 자리잡고 있다.

아마도 푸틴은 칡덩굴처럼 엉켜 있는 전세계의 공급 체인을 너무 쉽게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러시아의 경우 자원은 풍부하지만 부품소재 산업은 극히 취약하다. 첨단소재의 수입 의존도가 높고 특히 반도체는 거의 100% 수입에 의존한다. 만약 현재의 무역제재가 장기화될 경우 첨단 군사장비 생산을 중단해야만 한다.

세계화가 전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만들었다면 디지털화는 시간과 공간을 없애버렸다. 특히 비즈니스의 본질을 기업이 아닌 네트워크 즉, 플랫폼 중심으로 변화시켰다. 페이스북, 위챗, 인스타그램, 카톡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네트워크 사회에서 한 구성원은 나홀로 존재할 수 없다. 다른 구성원과의 관계를 형성해야 가치를 만들어 갈 수 있고 그 관계망에 따라 자신의 가치가 생긴다. 결국 네트워크 사회에서 중요한 가치는 신뢰자본이다. 신뢰가 없으면 연결망이 끊어지고 스스로의 가치가 떨어지고 만다. 20세기 방식이라면 토지와 자본이 중요했다면 이젠 중요한 자본은 신뢰인 것이다.

반대로 네트워크 세상에서 네트워크로부터 차단을 당한다면 어찌 될 까? 졸지에 시스템 아웃이다. 무인도에 갇힌 거나 마찬가지다. 아마도 러시아는 앞으로 자국 주도의 플랫폼을 만들려고 노력할 것이다. SWIFT를 대체할 금융결제망이나, 간편결제망, 문화 플랫폼을 구축하려는 노력을 하게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플랫폼이란 혼자서는 어렵고 시간이 걸리며,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불가능할 수도 있음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시간과 거리가 소멸되는 디지털 세상에선 언젠가 국가보다는 플랫폼이 우위에 서는 시대가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한 국력이 영토나 인구와 별 상관 없는 시대일지도 모른다.

[워싱턴=AP/뉴시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5일(현지시간) 백악관 아이젠하워 행정동에서 2022 통합 예산안에 서명하고 있다. 이번 예산안은 총 1조5000억 달러 규모의 자금이 책정됐으며 130억 달러 규모의 우크라이나 긴급 원조도 포함됐다.
[워싱턴=AP/뉴시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5일(현지시간) 백악관 아이젠하워 행정동에서 2022 통합 예산안에 서명하고 있다. 이번 예산안은 총 1조5000억 달러 규모의 자금이 책정됐으며 130억 달러 규모의 우크라이나 긴급 원조도 포함됐다.

초연결된 세상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그 역사적 배경은 제쳐두고 영토 중심의 20세기적 발상에서 비롯됐다는 느낌이다. 영토를 회복해야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다는 것?그러나 초연결세상에서 상실한 신뢰는 언제 회복될 수 있을까?

이번 사태를 통해 러시아가 국토를 넓히는 (과거의 잣대로서의) 성과를 거두더라도 네트워크 사회에서 신뢰를 상실한 비용에 훨씬 못미치는 결과가 될 공산이 크다.

※ 최성범 주필 겸 선임기자는 서울경제 금융부장과 법률방송 부사장, 신한금융지주 홍보팀장, 우석대 신문방송학과 조교수를 지내는 등 언론계 및 학계, 산업 현장에서 실무 능력과 이론을 쌓은 경제전문가입니다.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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