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범의 경제산책

[이코노뉴스=최성범 주필] ‘지난 반세기 동안 국책은행으로서 성장 동력 산업 확충, 경제 위기 극복 등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역할 수행으로 산업 및 국민경제 발전을 선도하였습니다.’ KDB산업은행의 홈페이지에 나오는 회사소개다.

▲ 최성범 주필

이어 연대별 성과를 나열하고 있다. 전쟁으로 파괴된 산업시설의 복구와 기간시설 증강 지원(195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부응해 전력 석탄 등 기초 에너지 산업과 철강, 조선, 기계 등 중화학 공업, 수출전략산업부문의 설비 금융 중점 육성(1960~1970년대), 자동차 전자 산업등 장기 설비 금융을 지원하여 국가 성장기반 구축에 기여(1980년대), 경제의개방화 추세에 부응하여 국제경쟁력 제고를 위한 기업금융 확대와 반도체등 첨단산업 중점 육성(1990년대), 국책은행으로 금융시장의 불안을 해소하고 기업 구조조정을 주도하면서 미래성장동력의 발굴, 사회간접자본 확충(00년대).

실제로 산업은행은 1954년 산업발전과 국민 경제의 발전을 위해 설립된 이래 한국경제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해 왔다. 한국경제가 대규모 투자가 필요할 때마다 산업은행은 든든한 자금줄 역할을 하는 동시에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산업은행은 기업구조조정 주도하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 받았다. 금감원이 발표하는 주채무기업 명단 39개 기업 가운데 산업은행이 주채권은행을 맡고 있는 기업이 12개나 되는 것도 이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기업들의 부실 징후를 보이면 시중은행들은 대출금을 회수하는 반면 산은은 국책은행이라는 이유로 부실 기업의 주 채권 은행이 되고 했던 탓이다.

산업은행이 구조조정을 담당한 기업은 대우조선해양, 한진해운, 현대상선, 한진중공업, STX조선해양, 동국제강, 한진그룹, 현대그룹, 금호아시아나, 대우건설 등이다. 구조조정의 사령탑이라는 별명이 나올 지경이다. 여기에 한국GM에는 2대주주로서 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산업은행이 구조조정 전도사라는 새로운 역할에 있어서 거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경제의 환부를 도려낸 뒤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기대와는 달리 일 처리는 지지부진하고 효율성마저 떨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거의 상습적으로 구조조정을 실기하는 바람에 한국경제의 환부가 오히려 곪고 있다는 평가마저 받는다.

물론 정부를 대신해 기업 구조조정을 담당하는 일이 보통 일은 아니다. 금융의 논리와 산업의 논리를 모두 고려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 변수마저 고려해야 한다. 정부가 지난해 12월 확정한 ‘새로운 기업 구조조정 추진방안’에서 국민경제에 영향이 크고, 산업 전반적으로 구조적 부진에 직면했으며, 국가 전략산업을 영위하는 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은 산업과 금융의 논리가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밝힌 것도 그만큼 구조조정이 어렵다는 것을 말해준다.

▲ 의사역할은 커녕 환자를 방치해왔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산업은행에 대해 역할 조정을 다시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사진은 산업은행이 2대주주로 있는 한국GM 전북 군산공장이 가동이 중단돼 문이 닫혀있는 모습. /뉴시스 자료사진

어떤 면에선 정부가 직접 해야 할 일을 산은이 떠밀려 맡게 된 인상마저 없지 않다. 구조조정의 전도사라는 명분 아래 지분을 보유한 회사만 늘어났을 뿐이다. 산은이 지분 보유나 출자 등의 형태로 투자한 기업이 총 145 곳에 달한다.

그렇다고 구조조정이 어려운 일이고 등을 떠밀려 맡게 된 역할임을 감안해도 산은이 낙제점을 면키 어렵다. 대주주 또는 주요주주로서 최소한의 역할조차 방기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장기간에 걸쳐 대규모 분식회계가 이뤄져 왔다는 게 드러난 대우조선 해양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산업은행은 1999년 대우조선해양을 자회사로 둔 지 8년만인 2008년 매물로 내놓았고, 한화가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지만 노조의 반발과 한화의 인수대금 분할납부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는 등 미온적인 태도로 매각은 불발됐다. 이후 산은 자회사로 남아 있게 된 대우조선해양은 부실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특히 무려 5조원대의 분식회계로 대우조선해양은 손 쓸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말았다. 이로 인해 전임 대표이사 두 명을 포함해 경영진들과 담당 회계사들이 실형을 선고 받았다. 대주주인 산업은행이 관리에 조금만 신경을 썼어도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란 비판을 받았다. 국민의 세금으로 인수한 부실기업을 제대로 관리해야 할 본연의 책임을 방기하는 바람에 대우조선해양은 조선산업 불황이 겹치면서 부실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최근 한국 GM의 경우도 사정이 비슷하다. 2대주주이긴 하지만 한국정부를 대표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2대 주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GM이 한국 GM을 현금인출기 식으로 빼먹는 과정에서 산은이 사실상 방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근 금호타이어 경영정상화 과정도 안개 속을 헤매는 듯한 모습이다. 수년째 진행 중인 주인 찾아주기 과정에서 회사의 부실화가 심화되고 있다. 중국 회사인 더블스타에 경영권을 넘기기로 했으나 노조 측의 거센 반발 속에 앞날이 불투명하다. 산은이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의사역할은 커녕 환자 방치하는 산업은행 거센 비난 직면

뿌리 깊은 환부를 도려내거나 근본 치료를 하기는 커녕 대증요법으로 일관하거나 정부, 채권단, 노조 사이에서 머뭇거리다가 치료 시기를 놓치는 모습이 산은이 보여준 행태다. 이는 정부로부터 구조조정 전문 국책은행으로서의 새로운 역할을 부여 받았다고는 하지만 감독 당국과의 역할이 중복될 뿐만 아니라 채권단, 정치권 그리고 노조 사이의 중재 역할을 하기엔 산은의 역량이 턱 없이 부족하다는 게 지배적인 평가다.

결국 금융당국이 2009년 이후 사실상 기업 구조조정에서 손을 놓고 산업은행도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구조조정은 지지부진하고 결국 한국경제의 부담만 커지고 있는 양상이다. 실제로 기업구조조정 평가손실 예상액 56조원 가운데 절반인 29조원이 산업은행이 관리하는 기업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이 국감에서 드러나기도 했다. 구조조정의 명분으로 자회사만 늘렸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처럼 눈치보기와 시간끌기로 부실기업 구조조정이 늦어지면서 한국 경제가 그 부담을 통째로 안고 있다. 이에 따라 산은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재정립이 요구된다는 지적이다. 그렇지 않아도 기력이 쇠잔해 지는 한국의 제조업에 대해 산업은행이 의사 역할을 하기는 커녕 환자를 방치하는 모습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산은을 전면에 내세워 비난의 화살을 일단 피해 온 정부도 산은의 역할이 한계를 드러낸 이상 역할 조정에 나설 때다.

 

※ 최성범 주필은 서울경제 금융부장과 법률방송 부사장, 신한금융지주 홍보팀장, 우석대 신문방송학과 조교수를 지내는 등 언론계 및 학계, 산업 현장에서 실무 능력과 이론을 쌓은 경제전문가입니다.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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