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김미영 칼럼니스트] 서울대 미학과 학생회가 농활을 갔다. 고된 일에 적응하느라 바쁘게 며칠 지난 뒤 주민과 학생은 술자리를 마련한다. 화기애애하게 술잔이 돌고, 한 노총각이 농활대 대장인 여학생의 벗은 발을 보고 말한다. 너는 발가락이 어쩜 그리 섹시하냐 하얗고 가지런한 것이. 그 학생은 뻗었던 발을 거둬들이는 걸로 의사표시를 했으나 그 남자는 못 알아듣는다. 돌이킬 수 없는 한마디.

▲ 김미영 칼럼니스트

내 한번 쪽쪽 빨아보고 잡게 생긴 발가락이다. 순간 좌중은 얼어붙고 술자리는 파토난다. 몇몇 여학생들이 사과를 요구했으나 그는 되려 성깔을 부린다. 대체 뭘 잘못했다는 거야. 학생들은 일을 접고 공식사과를 요구한다. 이장으로부터 말을 건네받은 그 총각, 정말로 뽀뽀하겠다는 뜻은 아니었소. 그건 중요치 않습니다. 그 학생이 수치심을 느꼈다는 게 중요하지요.

수치심? 그 애 발이 내 입보다 깨끗한가? 그 웃픈 사건은 도지사란 양반이 나타나 위세를 부려 억지 사과를 시키는 순간 그 공동의 적 앞에 단번에 해소된다. 손아람의 소설 <디 마이너스>에 나오는 얘기다.

서울대 미학과 여학생과 농촌의 노총각이 만날 확률은 금성여자와 화성남자가 만날 확률보다 약간 높을까? 여간해선 만나지지 않을 두 집단이 만나게 된 것도, 그래서 그 남자가 성희롱의 개념을 배우게 된 것도 ‘운동’ 덕택이다. 큰 망신 안 당하고 우정어린 분위기에서 배우게 된 게 어딘가!

각질처럼 눌어붙은 관행을 깨자는, 부조리하지만 몸에 익었다고 살던 대로 살지는 말자는, 불가능한 것을 꿈꾸고 가능하게 만들자는, 뿌리부터 다시 들여다보자는(radical) 것이 ‘운동’. 그 앞에 학생이 붙든 노동이 붙든 시민이 붙든 촛불이 붙든, 그 운동들을 통해 우리는 견고하기 이를 데 없는 분단체제에 틈을 내며 우리 사회를 민주주의 쪽으로 ‘끄을고’ 나갔다.

수천년 종족의 한을 단번에 풀자고 들지 말라고 했다. 언제나 능변인 한 선배가 잦은 부부싸움 끝에 던지곤 하던 대사다. 술자리 끝에 후배들을 잔뜩 몰고 집에 갔는데 아침 댓바람에 그 선배 와이프 (같은 과 선배)는 일갈했다. 어디 돈 맡겨놨어?

‘양처’스럽지 못한 모습을 은근 욕한 것을 반성할 수 있을 만큼 나는 나를 젠더 문제에 계몽시켰다. 그러나 공부는 여자들만 했나, 그 말을 들은 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남녀관계의 풍경은 그리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유서깊은 가부장제, 이제 자본주의 판본의 가부장제 운운 하여 문제를 근본화하고 싶지는 않다.

▲ 제주여성인권연대 회원들이 지난 19일 오전 제주도의회 도민의방에서 열린 제주지역 #미투선언 지지 기자회견에서 #Me too(나도 피해자), #With you(지지합니다) 피켓을 손에 들고 있다./뉴시스 자료사진

문제의 구조적 설명은 개인의 책임을 면제할 때가 너무 많다. 강사로 떠돌며 돈도 못 버는 터에 잦은 술타령은 웬말이며 일고여덟명 해장국 타령은 웬말인가. 철없는 행동에 대한 당연한 타박을 수천년 종족의 한 어쩌고로 받는 것을 보다시피. 가부장제의 물질적 근간은 남성가장이 생계를 책임진다는 것인데….

다만 민주주의의 도도한 흐름이랄까 촛불의 다이내믹이랄까 하는 것이 젠더관계, 섹슈얼리티 사안에 대해서도 쇄도하는 지금, 자신의 문화지체를 반성하고 시급히 따라잡으려는 노력을 하기는커녕 한 미국 늙다리(마이크 펜스 부통령)의 옹색한 처신을 뭐라뭐라 이름붙여 대단한 룰인 양 따라하는 일부 행태가 꼴사납다는 것이다. 영어 제목 붙은 건 다 있어보이고 따라하고 싶은가?

지금의 젊은 여성들은 광우병 촛불의 주체로 맨 먼저 나선 이들이고, 유모차 부대의 자매들이며, 정유라의 부정입학을 문제삼아 박근혜를 몰아낸 이들이다. 그들을 상대로 펜스룰을 좌우명으로 삼겠다는 것은 가정불화를 불지르겠다는 소리고 일자리에서 꼰대로 입신하겠다는 말이다.

▲ 뉴시스 자료사진

그러거나 말거나 각자 국량껏 살밖에 없겠으나 못난이 남성연대의 우물 속 박수소리에, 그 에코에 취하다가는 그 말로가 최소(?)로는 고립이요 최대로는 전락(감옥행)이니 걱정이 조금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차기 차차기 어쩌고 하던 인사의 날개없는 추락은 그가 유명인사여서 더 ‘화려’했겠으나 언론의 각광도 받지 못한 채 스러져갈 남성들을 생각하면 내 일도 아닌데 왜 이리 걱정인지. 츳츳츳.

※ 김미영 칼럼리스트는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고대, 홍대 등에서 강사로 일했고 학술연구교수를 역임했다.

전공은 현대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로 관련 책과 논문을 여럿 발표했으며 섹슈얼리티 문제도 연구했다. 광우병 사태 즈음에 한겨레신문에 컬럼을 연재한 경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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