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김미영 칼럼니스트] 영하 20도의 한데서 한 사람이 옷을 홀랑 벗고 서 있다. 시베리아보다 춥다는 칼바람의 지난 겨울을 통과한 우리로서는 그 추위가 어떨지, 살랑대는 봄바람이 우리 얄팍한 기억을 교란시키는 와중에도 몸이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오싹 바들바들.

▲ 김미영 칼럼니스트

그 날씨에 바깥에서 발가벗고 서 있는 그는 무엇인가? ①미치광이 ②변태(바바리맨의 진화형) ③동물보호단체회원(“no fur!”) ④선녀 ⑤생물학자 ⑥그 때 그 때 달라요

“옷의 보호를 받지 않고 숲의 동물처럼 추위를 경험하고 싶다.” 이것이 생물학자인 데이비드 해스컬이 영하 20도의 북풍 속에 옷을 벗은 이유이다. 첫 2초는 “의외로 상쾌”하단다. 그러나 금방 머리가 지끈거리고 살갗이 타는 듯하다. 몸이 사정없이 휘청거리고 떨린다.

공포가 엄습한다. 허둥지둥 옷을 입는다. 손이 곱아서 옷을 집기도 힘들고 혈압이 확 치솟을 때처럼 머리가 아프다. 그가 버틴 시간은 “고작” 1분이었다. 만일 그가 우직하게 더 버텼다면 졸음과 환각이 밀려드고 정신착란을 일으키고 장기기능이 정지되고 자연으로 돌아갔을 것. 대략 한 시간 안에.

그런 ‘실험’을 하면서 그가 던진 질문. 왜 미국박새는 얼어죽지 않는가? 이 질문을 하려면 여러 지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모든 물체는 부피가 길이의 세제곱에 비례해 증가한다. 그런데 열을 잃어버리는 표면적은 길이에 비례해 증가한다. 그러니 작을수록 몸피(부피)에 비해 겉넓이가 (비율상) 크게 되고 몸이 쉽게 차가워진다.

그래서 베르크만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동물 종이 넓은 지역에서 오래 서식하는 경우 북부에 사는 종이 남부에 사는 종보다 몸집이 크다는 것. 미국박새보다 몸무게가 1만 배나 더 나가는 “나”가 이렇게 맥을 못 추니 그 새들은 몇 초 안에 몰살되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답은 책 속에 있으니 찾아보시라.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의 <숲에서 우주를 보다> 말이다. 미국 생물학자인 그가 테네시 주 산악지대의 오래된 숲에서 지름 1미터 정도의, 숲을 정처없이 걷다가 앉기에 적당한 바위가 있어 골라잡은 땅 한 뙈기를 “나의 만다라”라 칭하고 거기를 일 년에 걸쳐 관찰하여 쓴 책이다.

아는 나무가 스무 가지 남짓인 나로서는 읽기 매우 어렵다. 그의 설명은 남달리 강한 생명력 어쩌고 하는 상투어가 없다. 대신 철학적 메타포가 넘쳐난다. 가령 맵시벌이라는 ‘악의 문제’와 변신론. 그래서 재밌다.

1월 1일 첫 날 첫 꼭지로 그는 무엇을 말할까? 바위에 덮힌 지의류다. 말이 어려워서 검색해보니 바위나 나무 위에 이끼나 곰팡이 피듯 희끗희끗한 것이 지의류란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겨울에도 생기를 뿜어내는 지의류.

주위 온도에 따라 생명 활동을 조절해 습할 때는 부풀고 건조할 때는 쪼그라들고, 추우면 얕은 잠을 자고 한단다. 버림의 역설, 유연한 삶의 방식. 장자의 순리를 통한 승리에 통달한 자.

그것도 홀로 잘나서가 아니라 균류와 조류, 균류와 세균이 합쳐진 ‘결혼’생활 때문. 연합, 융합, 제휴관계 그리고 (이것도 결혼의 한 면!) 약탈과 착취. 그러나 “기생충 연가시조차 몸 속에 (협력하는) 미토콘드리아가 없으면 살 수 없어..... 약탈의 원동력은 협력”이란다.

그렇다고 그가 미세한 생물에 돋보기를 들이대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땅을 구성하는 것들, 그의 시선과 마음이 이르는 곳은 어디일까. 이끼, 노루귀, 물관, 방귀버섯 같은 것 그리고 도롱뇽, 달팽이, 반딧불이, 털애벌레 같은 것, 그리고 영원과 코요테, 독수리와 쇠콘도르, 단풍나무와 히코리 같은 것, 그리고 놀랍게도 바람, 지진, 미풍이 전달하는 경보음의 파도, 양달(햇빛의 움직임), 새의 노래와 발자국까지. 사족 같은 인간 생물학자도.

 

그 마이크로에서 매크로에 이르는 다양한 생명들이 존재하는 방식은 ‘결혼’, ‘얽힘’, ‘물결’, ‘파도’, 그리하여 ‘만다라’, 숲의 공동체. 평화로 점철된? 노우. 이를테면 식물과 초식곤충의 생화학적 결투, 숭고한 결투가 만다라의 기본적 특징이고 보면.

그러나 숲은 보이지 않는다. 주말마다 북한산을 오르고 휴가 때면 휴양림을 걸어도 우리는 자연의 파편만 스친다. 책으로 배우는 경우는 또 어떤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산사나무 아래서>를 읽었을지언정 안산 둘레길의 산사나무를 알아보지는 못한다. “보는 눈은 드물고 이해하는 마음도 드물다.”

책의 원제는 The Forest Unseen 이다. 왜 보이지 않는가. 숲에 있으면서 왜 우리는 눈 뜬 소경인가. 근본적으로는 인간 시각의 한계가 있을 듯. 그리고 인간 언어와 문화라는 편파.

▲ 미국 중서부 도시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고원 지대의 숲과 사슴/뉴시스 자료사진

첫째, 작은 것들. 무한히 작은 원자세계, 이끼에 달라붙은 물방울, 돋보기를 대고 더 가까이 가야 보이는 달팽이. 매복한 채 피의 성배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진드기 역시.

둘째, 빠르거나 느려서. 전자는 도롱뇽 같은 것. 후자는 동 트고 한 시간 지나 꽃봉우리가 열리고 또 한 시간이 지나 줄기가 곧게 펴지는 노루귀. 대체로 개화의 순간.

셋째, 안에 있어서. 러시아 인형 마트로시카처럼 안에 차곡차곡 들어 있거나 땅 속에 있거나. 식물- 매미충- 세균의 ‘마트로시카’. 땅 속 균류가 우리 감각 세계에 들어오는 것은 자실체를 튀운 뒤. 땅 속에 사는 무수한 동물이야 물론이고.

넷째, 거대해서. 지진 일어난 다음날 숲의 풍경은 기대와 달리 변함없다. “지질학의 속도와 규모는 생물학적 경험과 공존할 수 없다.” 생명의 찰나와 바위의 영겁. 만다라에 날라온 골프공도 이온 강화 열가소성 플라스틱 먼지가 될 것이고 결국엔 새로운 암석으로 굳어질 것이나 우린 볼 수 없다.

다섯째,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내 혈액을 구성하는 원자를 만다라로 추진한 것은 모기 덕이니 모기가 나의 원자 일부를 가져가 알 속에 재배열하는 것.” 모기, 바이러스, 인간, 그 바깥으로 끝없이 펄럭이며 돌아다니는 주름 같은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 많은 것을 살피는 그의 자세. “숲에서 앉아 있거나 걸을 때 나는 ‘대상’을 관찰하는 ‘주체’가 아니다. 나는 만다라에 들어가 소통의 거미줄, 관계의 그물망에 걸린다. 알든 모르든 나는 사슴을 놀래키고 줄무늬다람쥐를 겁주고 산 잎을 밟아 이 그물망에 변화를 일으킨다. 만다라에서는 대상과 분리되어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물망은 나 또한 변화시킨다.” (265)

그러나 ‘나’는 얼마나 사소한 존재인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내가 이곳에서 불필요한 존재임을, 인류 전체가 그러함을 깨달았다. 깨달았으니 외롭다. 내가 숲과 무관한 존재라는 사실이 아프다.” “생명은 우리를 초월한다. 인류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므로 우리는 바깥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인상적인 부분은 만다라에 날라온 골프공을 치울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은 생각. 골프공을 치우는 것은 이 모든 인공물 중 가장 도드라지는 것을 치워 숲이 인간과 분리된 ‘순수한’ 존재라는 환상을 유지할 뿐이다. 그러나 책임감을 자기 혐오로 바꾸지는 말고. 세상에 대한 연민을 말할 때 그 ‘세상’에는 우리 자신도 포함되므로.

“버려진 골프공을 비롯하여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 참여하는 연습을 하는 것 또한 가치 있는 일이다.”(226) 이런 낙관은 인간의 시간을 넘어선 거대한 시간 단위를 보기 때문일까?

태풍에 쓰러진 나무를 흉물 취급하며 신속히 치우는 우리로서야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거대한.

※ 김미영 칼럼리스트는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고대, 홍대 등에서 강사로 일했고 학술연구교수를 역임했다.

전공은 현대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로 관련 책과 논문을 여럿 발표했으며 섹슈얼리티 문제도 연구했다. 광우병 사태 즈음에 한겨레신문에 컬럼을 연재한 경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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