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의 신간서평

[이코노뉴스=김선태 편집위원] 비록 책의 제목이 문화를 어떻게 말할 것인지, 문화란 무엇인지 묻고 있지만 문화에 대한 정의가 이 책의 중심 논제는 아니다.

▲ 김선태 편집위원

중국은 문화대혁명 기간에 자기 문화를 파괴하여 ‘야만’ 또는 ‘미개'로 대치하려 했다. 이후 중국인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국의 문화를 갈구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지난날 파괴되었던 문화로 인해 중국인들의 삶에 심각한 결함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 결함이 왜 생기는지 따지려면 결국 중국 문화란 무엇인지 나아가 삶에서 문화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저자는 철학, 역사, 고전, 자연의 네 가지 방향에서 자신의 생각을 풀어간다. 그중 저자가 가장 애정을 가진 부분이 역사의 영역인데 이를 저자는 생명의 회답이라 명명한다. 역사를 생명이라 칭한 것은 곧 선대 문화인들이 자신의 생명을 바쳐 ‘문화의 비밀’을 밝혀 나갔기 때문인데, 저자는 셰진(謝陳), 황쭤린(黃佐臨), 바진(巴金), 특별히 저우언라이(周恩来) 총리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중국 문화를 유지해 온 ‘삼족 정립’

이 책에서 저자가 문화를 말할 때는 언제나 중국 문화를 염두에 둔 것이다. '학리적 회답’ 편에서 저자는 중국 문화의 특징을 말하려면 '다른 문화와 구별되는 진정한 특수성'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중국 문화의 특성을 세 가지 개념으로 설명한다. 먼저 ‘예의’를 패러다임으로 삼았기에 수천 년 동안 장중하고 단정한 모습을 유지했으나 의제적 형식과 번거로운 절차에 빠지기 쉽다.

다음으로 ‘군자'와 ‘소인’의 경계를 중시해 실패해도 군자처럼 행동하려 하지, 소인이 되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중용’을 사유의 기본으로 삼아 극단을 경계하고, 거대한 재난 앞에서 치유의 근거가 되었다. 이들이 모여 중국 문화를 유지하는 이른바 삼족정립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 『위치우위, 문화란 무엇인가』 = 위치우위. 이다미디어. 352쪽

중국 문화의 폐단 역시 지적한다. 충효를 중시하나 공공의 공간에 소홀하고, 과학 정신이 결여되어 실증 의식이 부족하고, 영웅을 칭송하되 법률 관념이 희박한 것들을 예로 든다. 저자는 이 또한 엄연한 중국 문화이나 몇 세대를 거치건 극복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다른 문화에도 이처럼 양면성이 있을 것인데, 이를 악용하여 상대 문화의 약점을 부각시키면 자칫 대립과 충돌을 미화하기 쉽다. 저자는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 그 전형적인 경우라고 말한다. 문화 또는 문명에는 상호 융합과 사호 영향력이 충돌보다 보편적이라는 이유인데, 이를 희석했다는 것이다.

진정한 인격을 보여 준 셰진 감독

‘생명의 회답’ 편은 저자가 진정으로 문화인이라 생각하는 인물들에게 바치는 헌사들이다. 먼저 1923년 저장성에서 태어나 한 시대를 풍미하다 떠난 중국 영화계의 거장 셰진 감독이 있다. 문화대혁명 기간 중국의 암울한 세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부용진'(1987)과 홍콩의 영국 반환에 맞춰 상연한 ‘아편전쟁'(1997) 등은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 조반파(급진파)들로부터 계급론을 부정하고 인성론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가혹한 비판을 받았지만 굴하지 않았다. 조반파들은 노동자들에게 그의 작품인 ‘무대 자매’를 보여주고 비판을 끌어내려 했지만, 오히려 노동자들이 감동한 나머지 눈물바다를 이루고 말았다.

그는 많은 작품과 업적을 남겼는데 슬하의 네 자식 가운데 정상적인 아이는 하나 뿐으로 집에 가보면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밖에 나가 수많은 일들을 감당할 수 있었는지 저자 자신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한다.

저자가 창작자로서 무엇이 힘든지 물었을 때 그는 “다른 모든 것은 어렵지 않으나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심사위원이나 평론가를 만났을 때는 어렵다”고 말했다. 그가 죽었을 때 남은 것이라고는 실내화와 정상이 아닌 넷째 아들뿐이었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찾아와 그의 집 안에 하얀 꽃을 바쳐 존경을 표했다고 한다.

버나드 쇼의 제자, 연극인 황쭤린

그 다음으로 황쭤린이 있다. 영국에서 버나드 쇼에게 희곡을 공부하던 그는 중일전쟁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상하이의 연극 무대를 통해 병사가 되었다. 신중국 건설 후 전국 문화계의 지도자로 일하던 그는 문혁 기간에 말할 수 없는 고초를 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문혁이 끝나자마자 작품을 구상하여 베이징에서 ‘갈릴레오’를 공연해 장안을 들썩이게 했다.

황쭤린은 젊어서는 화극의 중국화를 주도하였고, 개혁개방시기에도 왕성하게 활동하여 전통극의 발전에 영향을 미치는 동시에 화극 공연을 대중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황쭤린은 시련을 이겨내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저자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거기서 그는 자신의 스승 버나드 쇼가 벽난로에 새겨 놓은 다음 세 마디를 적어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그들이 욕을 하는구나.

무슨 욕을 하는가?

그냥 욕을 하게 내버려 두게나.

그 뒤 저자는 그의 유언에 따라, 누구건 자신을 향해 제멋대로 지껄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금의 반박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저우언라이. 저우언라이는 당시 총리지만 젊은 시절 문화계 인물이기도 했다. 5·4운동을 전후해서 중국 연극인들은 서양 근대극을 도입했는데, 이를 기존 전통극을 총칭하는 희곡이나 서양 오페라인 가극과 구별하여 화극이라 불렀다.

한 손에 혁명을, 다른 손에 연극을

당시 저우언라이는 학생운동의 중심인물로서 화극에 깊은 관심을 보여 1914년 남개신극단을 결성, 중국 연극(화극)사에 선구적인 자취를 남겼다. 그런 그가 문혁을 맞아 위로는 마오쩌둥을 보좌하고 아래로는 상관이 벌여놓은 사고, 아니 대재앙을 수습해야 하는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

문혁파가 활개 치는 와중에도 그는 왕성하게 움직여, 1971년에는 헨리 키신저와 함께 역사적인 중미 정상화를 선언하기도 했고 여세를 몰아 문혁 이전의 교육을 부활시키고자 했다. 중병으로 몇 차례 쓰러진 가운데 마오쩌둥의 반대조차 무력화시키며 교육을 재건하고 대규모 문화 사업을 추진하던 그가 있었기에 중국은 문혁의 폐허를 최대한 빨리 극복할 수 있었다. 1977년 전국 대학교에 교재가 보급되어 수업이 재개될 즈음, 저우언라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수천 년 중국 역사에서 전국 학교가 폐쇄된 때는 문혁 기간이 유일하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러 총체적으로 붕괴된 교육을 완벽하게 재건할 수 있었던 데는 저우언라이의 공헌이 결정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문화는 보편적인 개념이지만 그것을 알고자 하면 타자와 구별되는 자신의 문화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문화의 본질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신 있게 문화를 말할 수 있을까

문화가 정신적 가치와 생활 방식을 포함한 생태 공동체라 말하는 위치우위는 이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5천 년 전 황제 때의 무용인 윈먼을 평가하며 “굴원에서 위광중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가의 눈빛으로 본다면, 고토와 향수도 모두 문화, 그리고 예술로 돌려질 수 있다”고 말할 때, 그는 자국 문화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을 바탕으로 망가진 과거 문화의 복원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문화를 정의한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지난날 문혁 기간에 중국인들은 스스로 자신의 문화를 파괴했고, 그로 인한 자괴감이 결함으로 전화되어 오늘날 자국 문화를 극도로 갈구하는 것이라 풀이한다.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중국 문화를 온전하게 살려내고 지켜내야 중국이라는 나라가 나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국 문화에 대한 한없는 자부심, 수천 년 동안 거대 중국을 유지해 온 문화의 통합력에 대한 경외, 문화를 떠나서는 미래를 논할 수 없는 중국적 사고 체계, 위치우위의 문화론은 그 모든 것의 응축물과도 같다. 위치우위가 말하려는 문화는 이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위치우위가 중국 문화를 사유하듯이 우리 문화를 사유할 수 있을까, 우리는 숱한 위기의 시대에 파괴된 우리 문화를 얼마나 갈망하고 있을까, 우리는 우리의 과거로부터 출발해 문화를 말할 수 있을까, 하고.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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