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목숨같은 피’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산다’ 등 피는 곧 생명이다.

‘피땀 흘려 세운...’피와 눈물’ 등 피는 곧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 ’‘헌혈’ 등에서는 고귀한 사랑이 느껴진다.

▲ 남영진 논설고문

우리나라 병원에서 쓰이는 혈액중 95%를 대한적십자사가 헌혈을 통해 얻은 ‘국민의 피’로 충당한다. 지난해 11월 판문점을 통해 총상을 입고 귀순한 북한 병사를 살린 것은 아주대학교 이국종 교수의 열성과 기술이었으나 몸속에 1만300cc에 달하는 남한 국민의 피가 흠뻑 들어가지 않았으면 불가능했다.

이같이 소중한 피가 관리소홀로 버려지고 있다. 지난해 국회의 한국적십자사에 대한 국정감사장에서는 적십자사의 관리소홀로 183명분의 혈액이 버려졌다며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라는 지적이 나왔다.

가끔 언론에서 적십자 혈액원의 관리소홀로 헌혈에 의존하고 있는 ‘아까운 피’가 상해서 버려진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국민 누구나 한번쯤은 대학 시절 캠퍼스에서나 시내에서 헌혈을 하고 뿌듯한 심정으로 헌혈차를 나온 경험이 있어 이런 기사를 접할 때면 자기 피인 양 마음이 착잡하다.

혈액을 관리하는 대한적십자사의 관리소홀로 95만 유닛(unit·혈액팩 단위)이 버려진 것도 지적됐다.

자유한국당 김순례 의원이 적십자사로부터 제출받은 ‘최근 5년간 혈액폐기 현황’에 따르면, 2012년부터 2017년 8월까지 헌혈을 통해 생산된 총 혈액제제의 약 2.6%에 달하는 약 95만 유닛이 폐기됐다고 한다.

더욱이 혈액이 폐기된 사유 중 약 21%가 적십자사의 잘못된 채혈과 보관 방법으로 인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적십자사의 내부 기강 해이도 언급됐다.

자유한국당 송석준 의원에 제출된 자료에 따르면 3년간(2015년~2017년 7월말 현재) 비위행위로 징계를 받은 사람은 102명으로 2주에 1.5명 꼴로 비리행위를 저지르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가장 많은 비위행위로는 부적정한 혈액관리로 전체의 31.4% 32명이었다.

지난해 7월 대구경북혈액원에서 소속 의사가 혈장을 방치하고, 2016년 11월에는 전북혈액원에서 소속 의사가 사용가능한 혈액을 폐기하는 황당한 일도 발생했다.

이에 송 의원은 “대한적십자사의 기강이 땅에 떨어졌다”며 “엄정한 직무관리 감독으로 인도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적십자사 본연의 자세로 돌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민주당 기동민 의원은 적십자사에서 제출받은 성분 혈장 원가 자료를 공개하고 현행 적십자사의 전반적인 혈액 관리제도 재검토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에 따르면 녹십자와 SK플라즈마는 혈액제제의 원료인 성분채혈혈장을 적십자사로부터 표준원가 대비 71%, 신선 동결혈장은 70.3%, 동결혈장은 65.2% 수준으로 납품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기 의원은 “국민의 헌혈로 생산한 혈장이 제약사에 원가에도 못 미치는 헐값에 팔리고 있다는 것은 큰 문제”라 꼬집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우선 적십자사의 안이한 태도에서 기인한다. 혈액공급을 독점하고 있고 세금과 비슷한 적십자사 회비를 내고 있는 국민들로서는 혈액원에 문제가 생기면 곧 세금을 잘못 쓰고 있다고 생각한다.

▲ 육군 11사단 공병대대 장병이 지난해 11월 29일 대한적십자사 헌혈차량에서 헌혈을 하고 있다./육군 11사단 제공

따라서 혈액원은 안전관리에 관한한 검증이 된 다국적 회사나 대기업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현재 우리나라 혈액안전 관련기업으로서 혈액안전검사 제품을 혈액원에 납품하고 있거나 납품했던 경험이 있는 기업은 대기업들뿐이다.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혈액안전을 검사하는 일부 시약을 개발해 납품하기도 하지만 대량으로 검사결과를 분석할 수 있는 전용장비를 개발한 기업은 없다. 단순히 글로벌 진단기업들의 검사시약들을 수입해서 팔기만 하는 기업들도 있다.

전용장비를 개발해서 신속한 시간 내에 대량의 검사결과를 분석할 수 있어야 세계 각국의 혈액원에 납품할 자격이 주어진다. 전용장비가 없으면 세계 각국 혈액원에 입찰할 수조차 없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다. 하지만 국내 대기업들은 전용장비 개발에도 매우 소극적이다.

대기업들이 수입해온 장비와 시약을 적십자사에 팔아도 돈을 버는데 굳이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필요한 전용장비를 개발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 혈액원시장에 진출하여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려는 목표가 없기 때문에 눈앞의 조그만 이익을 얻는 데 만족하는 것 같다.

우리 대기업들이 글로벌 진단기업으로의 도약이 불가능한 이유다. 지금도 혈액검사시약과 장비는 글로벌 기업들이 거의 납품하고 있지만 의지가 없는 국내 대기업들이 이를 대체하기는 힘들 것 같다.

‘식량주권’처럼 선진국엔 ‘국민혈액주권’이란 개념이 있다. 국민의 소중한 생명을 구하는 최후의 보루인 혈액관리는 안전한 검사가 생명이라는 것이다. 적십자사의 혈액안전관리가 다국적기업들의 혈액검사에 독점된다면 혈액주권은 외국인 손에 넘어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독점에 의해 혈액검사 비용이 높아갈 것이고 검사시스템 자체가 불안해질 것이다. 이는 결국 혈액재고 부족으로 이어져 재난이나 전쟁 등 정작 위급할 때 혈액이 적시에 공급되지 않을 수도 있다.

선진국들은 자국 기업들의 기술 개발을 독려하고 신기술이 개발되었을 때 적극적으로 도입한다.

일본적십자사 혈액원은 1980년대 일본 고유의 기술로 혈액안전진단키트를 개발한 후지레비오(Fujirebio)사의 기술을 전격 채택했다. 이때까지 후지레비오사의 제품은 납품 실적이 없었다. 이 회사는 이후 각국의 혈액원에 납품하는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왜 안 될까? 우선 적십자사 혈액원에서 다국적 기업들의 제품만 사용하고 새로운 기술을 가진 기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혈액주권이 상실되는 것이고 국내 혈액안전 관련기업들도 도태되는 것이다.

국가적으로 바이오산업에 대한 지원과 육성에 나서고 있고 새로운 기술 개발도 적극 도와주고 있다. 혁신신약기업에 이어 혁신의료기기기업관련 법안도 발의되어 있다. 특히 4차 산업혁명에 가장 적합한 질병의 선제적인 예방을 위한 체외진단 의료기기 산업의 육성이 아주 시급한 상황이다.

▲ 병원에서 간호사가 혈액을 채취하고 있다./뉴시스 자료사진

이런 분위기속에 국내 벤처기업들이 국내 대기업에서 감히 시도하지 못한 전용장비 개발을 추진하여 성공해 ‘다중면역진단’과 같은 새로운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고 한다.

이 기술을 도입하면 우리나라와 같이 혈액재고가 부족한 국가에서 보다 정확하고 글로벌 업체의 기술보다 2배나 빠른 혈액검사가 가능해 비용절감은 물론 생명이 위급한 환자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국내 중소 벤처 기업에서 개발된 다중면역진단기술과 국산 전용장비를 도입하면 두 마리 토끼를 잡는 효과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국가 혈액주권을 되찾음과 동시에 일본의 예와 같이 국내 신기술의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여 세계 시장에 진출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것이다.

적십자사 혈액원에는 많은 우수한 인력들이 근무하고 있어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다. 우리도 선진화된 혈액관리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 여건은 충분히 조성되어 있다.

다만 정부와 적십자사가 중소기업들이 이렇게 힘들여 개발한 신기술들을 도입하는데 주저하고 있다고 한다. 국내기술로 개발한 2배나 빠른 새 혈액검사 기술과 전용장비를 도입되면 글로벌 기업들과의 시계시장 경쟁을 벌일 수도 있을 것이다.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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