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대 성취에 경하를’ 이 아니라 ‘그대 행운에 감사를’
[이코노뉴스=김미영 칼럼니스트] 딸이 취업했다. 삼년의 취준 끝에. 최(종)합(격) 소식을 듣고 남편과 얼싸 안고 방방 뛰었다. 근 10년만의 격한 포옹 아닌가. 돼서 좋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안 되었을 때를 상상하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때가 때이니만치 자랑질은 자제했다. (이 글도 두 달 후 쓰는 겁니다.) 1호 조카는 멀쩡히 다니던 대기업을 나와 주식 공부에 매진한다 하여 의아했는데 다닐 수 있었으면 그러겠냐 말 안하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겠지 해서 그렇군 했고. 조카 2호는 외국 항공사 파일럿인데 무기한 무급 휴가를 받아 한국에 들어와 있고. 조카 3호는 키워야 할 핏덩어리 쌍둥이 새끼 내세워 읍소 끝에 정리해고를 육아휴직으로 막음하고.
그나마 이름 알려진 회사에 다니던 이들이 그러하고 그렇지 않은 젊은이들은 어찌 사는지 서로 안 묻는 게 예의가 되었다. 만날 일도 거의 없으니 굳이 연락해 들쑤시는 짓을 안 한다고나 할까.
그래도 터져 나오는 자랑을 봉쇄할 수는 없어(봉쇄하기 싫어) 친구들 위주로 슬쩍슬쩍 흘렸다. 돌아오는 반응의 온도가 미지근함에서 싸함까지 있었다.
한 동구권 작가가 소련이 최악이었던 것이, 지배자면서 사랑까지 받으려 했다고 어딘가 썼던데 잘 나가는 사람을 운수 나쁜 사람이 박수치고 환호해 줄 이유란 뭔가 하며 넘겼다.
미지근한 중에도 더 미지근함과 덜 미지근함이 있었는데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이 나를 애정하는 정도라거나 그 사람 인격의 완성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오해하지는 않았다. 차이를 만드는 것은 대체로 그 사람의 신세가 편하냐 아니냐이다. 큰 걱정 없는 이들이 타인의 경사에 기뻐하더란 말.
나의 경사에 에너지를 끌어 모아 목소리를 한 옥타브 올리는 데 실패하거나 처지는 입꼬리를 비끄러매거나 새나오는 한숨을 소리 없이 삼키는데 실패한 이들을 미워하지는 않지만 심플하게 기뻐해 주는 이들이 편한 것은 사실이니 이렇게 또 끼리끼리가 형성되는가 싶기도 하고.
나의 베프 한 명은 내 딸에게 금일봉을 하사했다. 메모엔 이렇게 써 있었다.
“긴 노력과 능력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갈 수 있는 행운을 얻었음을 엄청 축하한다.“
행운을 얻었다는 표현이 약간 걸린다. 노력과 능력을 먼저 말해 줬음에도 불구하고. 이 불편함은 뭐지? 내 딸이 잘나고 똑똑해서, 삼년이나 고생고생해 응당 그럴만해서 그 일자리를 잡아챘다고 믿고 싶은 건가?
어느 수준의 능력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맞다. 그 직장이 아무나 앉아 있어도 돌아가는 파놉티콘은 아니니. 그러나 1등의 능력과 1등의 노력이 있었기에 붙었다고는 할 수 없다. 일차 서류 심사에서 최종 면접까지 이르는 5~6 단계 그 어딘가에 있던 후보자들 가운데 ‘반드시 뽑혀야 마땅한’ 이도 없고 ‘뽑히는 게 너무 이상한’ 이도 없었을 것이다.
경쟁이 치열할 때 승리의 광채는 찬란하고 승자는 왔노라 싸웠노라 나 잘나 이겼노라 나대겠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경쟁률이 높을수록 자격을 갖춘 지원자도 많아 거기서 누가 뽑힐지는 그야말로 운이 결정한다고 할 수 있다.
같은 생각을 마이클 샌델도 했다. 지원자가 넘쳐 나는 미국 유명대학의 신입생을 추첨으로 뽑자고 했다. 소숫점 몇 자리까지 따져 승자를 결정하는 게 공정하다고 믿는 이들은 정말로 황당해하겠지만 샌델은 무려 하버드 로스쿨 교수고 치매 걸릴 나이가 아니다.
tvN <월간 커넥트>에 나온 누군가는 샌델이 착하다고 하던데 정치 주장은 품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각설하고 다시 내 딸 얘기로 돌아가면, 그는 어떻게 뽑혔을까. 시쳇말로 운칠기삼이고 운은 두 차원으로 있었다. 모모한 공채가 열렸을 때 지원을 할 정도의 위치에 이르기까지의 장기적 운, 그리고 운 때가 맞았다 할 때의 시운.
진부한 얘기지만 삼신할미 랜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소녀 가장이었다면, 한 푼이 아쉬워 급한 대로 아무데나 취직해야 했다면, 투잡 알바와 장시간 이동에 시달렸다면... 취업 공부하느라 3년이나 고생했다는 말은 3년이나 경제활동을 (상대적으로 맘 편히) 유예받을 수 있었다는 소리다.
삼신할미 랜덤이 작용하는 더 중요한 방식은 멘탈이다. 한 사람의 꿈과 포부, 그것을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결국은 이룰 거라는 다소 안정적인 자기확신, 그것을 위해 지금의 안락을 상당 기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음, 이런 것은 그냥 새해맞이 결심으로 생겨나는 게 아니다. 긴 시간 동안의 안정적인 보상체계가 합리성을 내장시킨다.
대학 강의할 때 법대 학생 한 명이 -고시 최종 합격한 이라고 벌써부터 주위 친구들이 영감님 받들어 모시는 모양이라 그 구경이 볼 만했다- 자기는 몇 년 동안 밥 먹는 시간 빼고 아무 것도 안하고 죽어라 공부만 했다고 수업시간에 비장하게 말하던데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었다.
그 때가 노무현 전 대통령 죽음 직후였는데 말이지. 니들 놀 때 나 공부했어 부르짖는 고3 정신계의 아저씨들, 특정 직업군에 아주 많다. 그렇게 억울하면 때려가며 공부시킨 그대 부모께 푸시고요, 지 잘 살려 한 일에 응석 좀 그만 떠시고요. 만사 작파하고 공부만 했다는 게 자랑할 일만도 아니고요.
시운은 어떤 모습으로 왔나. 우리 가족은 일요일이면 허리 아플 때까지 누워 있다 배고파서 할 수 없이 일어나 대강 끌어모은 먹거리를 아침으로 먹고 커피를 점심으로 먹으며 두세 시간 기운 좋게 수다를 떤다.
그 날 입씨름을 벌였던 핫 이슈가 –정작 본인은 핫이슈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며칠 후 면접 문제로 나온다면 이게 시운이 뻗친 게 아니고 뭔가. 면접관이 아빠와 동년배이고 아빠와 비슷한 정신 세계에 있는 아저씨들이라는 걸 깨달은 후 아빠의 실수를 각색해 면접관들을 웃겨주는 선방을 날리기도.
말보다 글이 백 배 편한 그는 면접에 가면 항상 많이 아쉬웠는데 면접관과의 래포 형성이 이리 순조로웠으니 우주의 기운이 돕는다고나 할까. 그 여유 속에 남들 다 말하는 교환학생 경험이 진부하다는 것도 알아챘고 남들 다 소심하게 원론만 강조할 때 현실적 딜레마를 솔직하게 건드리는 것도 가능했을 터.
그래서 어쩌라는 말인가.
승리는 얻어 걸린 것이니 오만하지 말라. 패자는 운수 나쁜 것에 불과하니 자학하지 말라. 잘나서 잘 나간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운 나쁜 이들을 못났다 경멸하면 그 분노는 트럼피즘으로 응결된다.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Tyranny of Merit>에 다 나오는 말이다. 사회를 원시적 폭력상태로 몰아가는 저 트럼프 지지자들!
오만과 경멸이라는 몹시 심리(학)적인 말들이 착하게 마음 먹고 살라는 샌델 아저씨 (할아버지) 훈계질이라 오해하지 말고 그것은 연대라는 사회적 태도를, 연대를 구체화할 사회 정치적 제도와 정책을 요구하는 키워드임을 상기하자.
무엇보다 몸을 써 일하는 이가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기를. 덕분에 챌린지 같은 립서비스 말고 진짜 찐 존중. 돈 들어가는 존중, 돈 써서 하는 존중. 자본주의적 존중.
그래야 할 이유는 우리가 선해서가 아니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나(혹은 내 새끼)를 어디로 몰아갈지 알 수 없다. (이 점을 인정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우리의 윤리를 박약하게 만든다.) 그러니 최악을 상정하고 그 최악에 내가(내 새끼가) 들어갈 수 있음을 상상하여 그 최악을 덜 최악이게 만들어 놓으라. 존 롤즈 <정의론>의 골자다.
※ 김미영 칼럼니스트는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고려대, 홍익대 등에서 강사로 일했고 학술연구교수를 역임했다.
전공은 현대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로 관련 책과 논문을 여럿 발표했으며 섹슈얼리티 문제도 연구했다. 광우병 사태 즈음에 한겨레신문에 칼럼을 연재했다. [이코노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