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자’의 진동계곡 서울서 2시간…왜 빨리 가야하나?

남영진 논설고문/행정학 박사 l승인2018.01.02l수정2018.01.07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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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봉준호 감독이 지난해 영화 ‘옥자’의 모티브를 잡았다는 진동계곡 ‘설피밭 지수네’에서 지난 연말 이틀 밤을 지내다 왔다.

요즘 말로 힐링을 위해 교육방송에서 일하는 후배와 15년 만에 함께 갔다. 그의 친구이며 언론계 후배인 김철한씨가 17년 전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설피밭길에 직접 지어 살아온 집을 15년 만에 찾은 것이다.

▲ 남영진 논설고문

김씨는 웃으며 “잘 나갈 때는 안 찾지만 일이 꼬이면 다시 오게 돼 있어요.”라며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 당선 뒤 바로였는데 그도 동아일보 기자를 하다 이곳이 맘에 들어 집짓고 정착한 지 얼마 안 될 때였다.

민박집이긴 하지만 그간 지인들이 많이 다녀갔단다. 현직 시장캠프에서 선거를 치르고 오는 사람들도 있고 천주교 신부들과 수녀, 사목 위원들이 피정 겸해서 묵고 갔다고 한다.

특이한 발상의 영화를 만들어온 봉준호 감독이 ‘괴물’(2006) ‘설국열차’(2013) 등 흥행보증영화를 만들고 이곳에 묵으면서 4년 만인 지난해 내놓은 ‘옥자’의 모티브를 이 집 둘째딸의 밝은 모습을 보고 얻었다는 전언이다. 집에 돌아와서 TV로 영화를 봤는데 맑은 계곡물, 파란 숲과 절벽 등 진동 계곡만이 아니라 강원도 백두대간 근처에서는 흔히 보이는 풍경이었다.

봉 감독의 ‘옥자’를 보면서 역시 황당무계하지만 현실성이 있는 그다운 발상이라는 생각은 했다. 유전자 조작으로 만든 ‘슈퍼돼지’(옥자)를 세계 26개국에 보내 성장 과정을 모니터해 선전을 통해 돈을 벌려는 미국 미란도그룹. 이들의 횡포에 맞서 강원도 산골에서 옥자와 함께 자란 소녀 미자가 미국 도살장까지 가서 이를 구해낸다는 황단한 스토리에 스릴이 있는 영화다. 소녀와 동물의 순수한 사랑을 바탕으로 돼지를 구해내는 극적인 스토리. 봉준호 감독 특유의 유머와 감각적 영상미가 재미를 더한다.

첫날 서울에서 오전에 출발해 2시간 거리의 서울-양양고속도를 마다하고 15년 전처럼 6번 경강국도를 탔다. 양평을 거쳐 홍천에서 닭갈비를 먹고 현리 성당에 잠깐 들러 오후 3시쯤 진동 설피밭길로 들어설 때는 눈이 쌓여 미끄러웠다.

15년 전에도 눈이 내리기 시작해 아침 일찍 서둘러 나오다 길가 밭고랑에 차가 빠진 걸 본 적이 있다. 집 앞에서 바퀴가 헛돌아 언덕아래 주차했다. 주인장이 다시 차를 몰아 한참을 후진하다 힘을 받아 민박집 앞까지 쑥 올라왔다. 호텔식 ‘발레파킹’을 해준 셈이었다.

▲ 영화 ‘옥자’ 스틸 컷/뉴시스

첫날밤 담배를 피러 밖에 나오니 보름달이 떠서 집 주위를 환하게 비추었다. 소설에서 읽었던 ‘교교한 달빛’이 떠올랐다. 이틀째 밤에는 양양 밑의 물치항에서 회를 먹고 조침령 고개를 올라왔다.

정상에 새로 만든 ‘조침령터널’을 지나서 싸락눈이 내려 길을 겨우 올라왔다. 이날 밤엔 당연히 달이 안 떴다. 작은 눈송이지만 바람이 집 쪽으로 불어와 얼굴을 할퀴고 페트병으로 만들어놓은 바람개비 소리가 요란했다. 시원한 소변을 보려 계곡물과 길이 보이는 바깥뜰로 나가니 저 밑의 작은 개울을 덮은 나뭇가지 숲에서 푸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추위에 갑자기 무서워져 방으로 급히 들어왔다.

진동계곡. 20여 년 전부터 언론에 많이 등장한 이름이다. 80년대 들어 마이카시대가 오더니 ‘바캉스’나 여름휴가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전국의 고속도로와 지방도가 포장되면서 오지나 비경들이 매스컴에 자주 소개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휴가철에는 서울-강릉간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강원도의 계곡이나 동해안으로 몰려가기 시작할 때쯤부터 ‘진동’이라는 이름이 오르내렸다. 15년 전에는 팬션과 민박집 10여채 있었으나 이번에 보니 양양으로 나가는 조침령터널이 뚫려서인지 입구부터 강선마을까지 60채는 넘어 보였다.

한국전력이 무주, 청평 등에 만든 양수발전소를 양양, 지리산 등에도 만들기로 결정했는데 환경운동가들이 발전소건설을 반대했다. 진동계곡을 가려면 군대 갔다온 남자들이면 다 아는 ‘인제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의 인제군 원통리를 지나 내린천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내린천’이 흘러내린 물이라는 뜻이 아니라 홍천군 내면의 계방산에서 시작해 인제군 기린면에서 설악산 백담사 쪽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합강정에서 합류하기 전까지의 물, 즉 내면-기린면의 앞뒤글자를 딴 이름이라는 것도 그대쯤 알려졌다.

이 물이 인제군을 거쳐 소위 ‘군축교’쪽에 이르면 소양강의 상류가 된다. 그러니 인제군 기린면 일대의 수많은 골짜기 미천골, 미산계곡, 아침가리계곡 등 이곳의 경관이 매우 뛰어나다.

▲ 강원도 인제 진동계곡/인제소방소=뉴시스 제공

그때만 해도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아 원시림에 가까운 숲이 잘 보전돼 있었다. 특히 가을 공기가 맑아 단풍 빛이 화사할 뿐 아니라 물속 너럭바위 사이로 어리는 맑은 계류가 흘러 단풍 관광객들 사이에 인기를 끌었다.

현리를 거쳐 진동리로 오르는 계곡은 의외로 순하다. 여기서 곰배령과 점봉산을 거쳐 오색서 설악산 대청봉을 오르는 전문 산악인도 있다. 이틀째 맑은 공기를 마시며 아침 10시 등산이 허용되자마자 곰배령을 올랐다. 2시간 만에 대청과 오대산이 보인다는 고개에 도착했다.

바로 북쪽으로 점봉산은 있었지만 대청봉은 보이지 않았다. 아래쪽이 오대산과 방동약수가 있는 방태산이다. 봄에 진달래, 봄철쭉이 온 산을 덮고 여름철에는 피서객들이 몰리는 미산계곡도 있다. 내려올 때는 푹신한 눈길이어서 1시간밖에 안 걸렸다.

남설악 범봉산(1,424m)에서 발원한 진동계곡은 방태산에서 내려온 방동천을 받아들여 70여리 물길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계류중 하나다. 1급수 고기인 버들치, 열목어가 살아 수달보호지역으로 지정됐다.

유네스코 지정 생물권 보호지역이지만 봄에 열리는 ‘진동계곡 산나물축제’에는 전국에서 관광버스가 몰려든다. 당연히 곰취, 곤드레 등 산나물은 물론 캐지만 이들이 내려올 때면 장터가 형성이 돼 축제가 된다. 진동엔 옥자도 미자도 없다. 축사가 없으니 옥자는 없고 미자들도 초등 분교를 졸업하면 상급학교로 진학하러 도시로 나간다.

이번 길에 함께한 후배는 동해안 바닷가 양양이 고향이다. 양양이지만 공수전계곡과 어성전 계곡이 남대천으로 합치는 월리가 태어난 곳이다. 전에는 고향에 갈 때마다 한계령을 넘기도 하고 이곳 진동을 거쳐 조침령을 넘기도 했단다.

근데 진동계곡 입구에 장장 11㎞ 길이의 터널이 있는 양양고속도로의 고가도로가 걸치자 당황되더란다. 서양양 IC에서 나와 조침령 고개를 올라 터널만 지나면 진동 입구가 된다. 서울에서 4시간 이상 걸리던 곳이 2시간이면 족하다.

그도 달라진 고향모습에 어릴 때의 추억이 사라져가는 걸 아쉬워하는 거다. 편리하고 빠른 게 좋은 것만은 아니다. 왜 빨리 가야 하느냐를 모르니 문제다.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 [이코노뉴스]
남영진 논설고문/행정학 박사   kumbokju032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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