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김미영 칼럼니스트] 딸의 씀씀이가 슬금슬금 커지는 것 같아 한마디 했다. 너 그렇게 돈 쓰는 데 맛 들렸다가 나중에 돈 못 버는 남편 만나면 어쩌려고?! 냉큼 날아온 답. 내가 벌어서 쓰지!? 흥 열정 페이가 표준 임금인 다큐멘터리 계에 종사하실 거라면서요, 돈이 퍽이나 벌리시겠어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키고 흐흐 그래라 속없이 웃는다.

▲ 김미영 칼럼니스트

새벽 기도 다녀오는 길에 저어기 언덕 위로 한 미친년이 나타나더란다. 심하게 헐벗은 모양이 미친년을 방불케 한 듯. 서로 접근해 식별하니 아이고 이건 내 딸. 당장 들어가 바꿔 입고 나가, 어떻게 니 혼자 하와이니. 엄마 오늘 아니면 이 옷 이제 못 입어. 그렇게 입고 다니다 험한 꼴 당하면 어떻게 해. 옷은 자기 표현이야 나쁜 놈이 나쁜 거지 왜 옷이 나빠. 말문이 탁 막히더란다.

벌써 체력이 달리시는지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횟수가 줄더란다. 간만에 늦게 들어온 딸에게 아아니 너는 여자가 이렇게 늦게 다니다 무슨 꼴을 당하려고 어쩌고 한 마디 했다가 옴팡 뒤집어 썼단다. 엄마 거기 여자가 왜 들어가, 왜 여자만 그렇게 제약되어야 하는데, 어쩌고저쩌고. 입에 밴 ‘여자가’를 미처 떼지 못해 딸에게 되잡혔다.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한 엄마. 삼시 세 끼 해 바치고 병원 수발까지 드니 그 남편이 (둘이 있을 때는) 완전 대왕대비마마 모시듯 한다는데. 여럿이 먹은 밥상 좀 맞들어 치우려 일어서는 남편을 시어머니가 눌러 앉히더란다. 그깟 일 조금 더 하는 게 힘들까 그 마음이 섭섭하지. 딸은 엄마 왜 그러고 사냐고 지청구만 먹일 뿐 일은 안 한단다.

다른 한 집. 가족여행 가 묵은 콘도에서 시어머니가 시집 조카들보다 어린 자기 딸을 지목해 설거지를 시키더란다. 딴에는 ‘에미’를 생각한 ‘페미니스트적’ 발상인데 다 큰 사촌 오빠들 앞에 설거지 하는 내 새끼? 그건 아니지. 어머니 쟤 시집가서 많이 할 건데 지금부터 시키기 싫어요 하며 자기가 했단다. 딸이 엄마 우리 같이 하자 하고 나선 것 같지는 않다.

시집가서 많이 할까? 어느 집에서 사위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더니 어머니 제가 할 일이 많아서요 하며 사양하더란다. 그 ‘할 일’은 청소와 빨래 등 집안일이었다나. 사돈이 봤다면 ‘내가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하며 기함을 할 거라고 킥킥댔다. 어떻게 키우긴, 잘 키웠지.

▲ 서울 종로구 보신각에서 열린 3·8 여성의 날 기념 ‘2017 페미니스트 광장’ 행사에서 여성단체회원들이 문예공연을 하고 있다./뉴시스 자료사진

여성주의에 관한 한 한 집안에 세 세대가 동거하는 모양. 문화지체의 산 표본으로 되어버린 ‘청개구리’ 남편과 예민하게 무장해 앞서 나가는 페미니스트 딸, 새중간에 끼어 있는 4,50대 엄마들. 남편 입단속 시키고 학습시키랴 딸 오금 박는 소리에 꼼짝없이 당하랴 아주 시소를 탄다. (남편보다 더 저 쪽인 시부모는 각자 에너지에 따라 각자 다른 정도의 관조와 달관.)

어느 정도 나이든 모든 세대는 자신을 낀 세대라 생각하는 듯하다. 거기 짙게 베어 있는 정서는 억울함. 하느라 하는데 보답받진 못하겠지? 내 남편은 지나치게 효잔데 내 아들은 눈곱만치도 아닌가벼. 변화를 환호하며 기꺼이 동참하는데 웬 구세대취급?

아빠와 딸의 양 극을 잇는 꼭지점으로서 엄마는 기계적 중립이라는 비겁한 자리가 아니라 딸의 든든한 동지로 자리매김하고서 온갖 전폭적인 지원을 한 게 사실이다. 무한 애프터 서비스는 나가서 일하고 커리어 우먼으로 당당하게 살라고 딸의 아이를 키워주는 데 이르지 않는가.

그런데 신뢰받는 가모장의 풍모라든가 뜨거운 자매(?)애로 보답받기는커녕 조선 아녀자 취급과 지청구가 적지 않으니 이 무슨 변고인고? 공을 깎아 먹는 말 방정, 그 놈의 ‘여자가’ 어쩌고 하는 유서 깊은 말 습관이 주적(主敵)이로다.

글로리아 스타이넘 말 마따나 다른 정치 이념은 젊을 때 래디컬하고 나이 들수록 희미해지는 데(소위 젊을 때 급진주의자가 아니면 가슴이 없는 거고 나이 들어서도 급진주의자면 머리가 없는 거라는.) 여성주의만큼은 나이 들수록 더 래디컬해지기 마련이니 저희들이 뭐라 하든 엄마들의 내공이 만만치 않을텐데 말이다.

젊은 여성들이야 할 말이 많겠지. 전철간의 치한이나 골목에서 스윽 가슴을 만지고 지나가는 변태들은 일회적이니 뭐 그렇다 치더라도 강의실의 꼰대 교수들, 직장의 조폭스러운 남성연대는 생활과 생계의 현장에서 지속적이고 근본적으로 여성의 삶을 위협한다.

▲ 글로리아 스타이넘/뉴시스 자료사진

용기를 내 한마디 하면 분위기 못 맞춘다 따돌리고 용기를 내 노우라고 하면 교활한 꽃뱀 취급하니 열심히 공부하고 실력을 쌓아 정당하게 경쟁해 당당히 살려 했던 젊은 여성들, 링에 오르자마자 꼴 같지 않게 강고한 복병을 만나 숱하게 좌절한다. 움직이는 동선, 몸 담는 공간 낱낱이 지뢰밭이요 전투장이거늘 집에서까지, 엄마한테까지 ‘여자가’ 소리를 들어야겠냐고.

그런데 각자 자기 입장이란 게 있으니 엄마 입장에서 한마디. 올바른 신조도 어 다르고 아 다르니 생활 속에 말과 태도는 좀 예의바르게 했으면 좋겠다. 여자가~~ 남자가~~를 앞세우는 젠더역할 구분과 고착, 그 불평등과 억압을 깨느라 좀 싸가지 없는 외양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돌아봤으면 좋겠다.

※ 김미영 칼럼리스트는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고대, 홍대 등에서 강사로 일했고 학술연구교수를 역임했다.

전공은 현대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로 관련 책과 논문을 여럿 발표했으며 섹슈얼리티 문제도 연구했다. 광우병 사태 즈음에 한겨레신문에 컬럼을 연재한 경험이 있다. 지금은 강사를 그만 두고 다양하게 읽고 다니고 보는 생활을 하고 있다.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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