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의 신간 리뷰

[이코노뉴스=김선태 편집위원] 2015년 9월 19일 일본 아베 정권은 안보법안을 통과시켜 전후 70년 만에 일본을 다시 전쟁 가능한 나라로 만들었다.

▲ 김선태 편집위원

이로써 일본은 공격받지 않는 한 방어만 한다는 평화헌법의 원칙을 깼다. 그들은 사실상 보통 군대를 이끌고 해외 파병을 할 수 있고, 동맹국의 요청이라는 형식만 취하면 즉각 자국 군대를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 미일 동맹 체제가 유지되는 현실에서 일본 자위대가 세계 어디에서나 전쟁에 개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시진핑, 난징추모제 참석해 일본에 경고

일본 안보법안의 직접적 이해당사자는 한국이다. 조선 말기에 일본은 운요호 사건이라는 함포 위협으로 강화도조약을 맺어 우리의 치외법권을 가져갔고, 이어 제물포조약으로 일본 군대를 국내에 주둔시켰고, 1894년에는 농민봉기 진압을 명분으로 경복궁을 점령, 사실상 조선을 수중에 넣었다. 이러한 역사가 보여주듯 오늘 일본은 자국민 보호를 명분 삼아 언제든 자위대를 앞세워 한국 내정에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 역시 일본의 군사적 행보에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그간 다양한 조치를 취해 왔는데, 예를 들어 지난 12월 8일 장쑤성 교육청과 난징시 교육국은 이 사건을 초중등 교과서에 싣기로 결정했다. 무엇보다 12월 13일 난징대학살 80주년을 맞아 시진핑 국가주석을 비롯한 주요 지도급 인사들이 장쑤(江蘇)성 ‘난징대학살 희생 동포 기념관’에 집결한다. 2014년 난징대학살 희생자 국가추모일이 지정된 이래 가장 강도 높은 행사로, 이는 중국 정부가 일본에 보내는 최고조의 메시지로 풀이된다.

▲ 중국 교과서에 실린 난징대학살 = 2017년 12월 8일, 장쑤(江蘇) 난징·진링(金陵) 중학교 허시(河西)분교 초등학교 5학년, 중학교 2학년, 고등학교 2학년생들이 난징대학살 희생자 관련 시범 수업을 받았다. (사진=중국망)

일각에서 이날 문재인 대통령의 방중 시 시진핑 주석이 수도 베이징을 비우는 일이 외교적 결례라 주장한다. 그렇지만 외교적으로 보자면 우리 정부가 난징 추모식을 맞은 중국인들에게 애도의 뜻을 밝히는 일이 먼저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난징대학살은 20세기에 자행된 가장 잔인한 인종 학살 중 하나이며 그로 인해 중국인들이 받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반인륜성과 야만성에서 히틀러의 아우슈비츠 대학살을 능가하는 데다, 극심한 잔혹성으로 인해 실상을 묘사하기조차 어려운 사건이다. 오죽하면 중국인들이 ‘난징도륙’이라 부르겠는가.

아래는 1938년 1월 일본 외무대신 히로타 고키(廣田弘毅)가 주미 일본대사관에 보낸 비밀 전문 내용이다.

“특별소식: (…) 일본군이 저지른 모든 행위와 폭력 수단은 아틸라왕과 흉노족을 연상시킨다. 최소 30만 명의 민간인이 살육됐고, 많은 수는 극도로 잔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방식으로 살해됐다. 전투가 끝난 지 수주가 지난 지역에서도 약탈과 아동 강간 등 민간에 대한 잔혹 행위가 계속되고 있다.”

1937년 12월 13일부터 1938년 2월까지 난징시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보고다. 정상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이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잔인함으로 인해, 이후 오랫동안 이 사건의 진위를 두고 국제적인 공방이 있었다. 일본은 학살 행위 자체를 부인했지만 이제는 국제 사회가 그 진상을 속속 알게 되었고, 이는 일본의 군사 행동에 대해 세계의 지성들이 유독 격렬히 반대하는 근거의 하나가 되고 있다.

자위대로 부활한 그날의 악마들

도대체 난징에서 그 때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이 책은 당시 참상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잔혹성을 삽화와 현장 사진, 회고록, 생존자의 증언, 재판 기록 등으로 생생하게 드러낸다. 현장 사진이라는 것은 대체로 학살, 아니 도륙을 저지른 일본군들이 자랑 삼아 찍어 보관하던 것들인데, 글로는 도무지 그 장면을 제대로 묘사할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사건의 전개를 주로 삽화에 의존하고 있다(『난징함락과 대학살』 = 저우얼푸 지음, 주전겅 그림. 이담북스. 142~183쪽 전4권).

사건의 대략적인 전개는 이렇다. 1937년 7월 7일, 일본이 중국에 대한 선전포고 없이 베이징 교외 노구교를 공격하면서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서구화된 일본군의 화력을 감당할 수 없었던 국민당 군대는 퇴각을 거듭했다. 수도이자 국부 쑨원의 묘가 있는 난징마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총통 장제스는 북벌 총사령관 출신 탕셩즈에게 방위를 맡긴 채 극비리에 우한으로 도망쳤다.

난징 공격을 주도한 부대가 일본 육군에서도 흉악하기로 정평이 난 6사단이라는 사실이 비극의 전조였다. 중국군은 허수아비처럼 무너졌고 탕셩즈는 증기선에 올라 피신했으며 양쯔강은 일본군이 쏘는 대포를 맞으며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중국 병사들로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그 자체가 대참사였는데 정작 사건은 여기부터 시작된다. 12월 12일 선봉에 선 노다 쓰요시 중대장이 난징 성루에 올라, 중국군의 피를 묻혀 점령 사실을 기록했다. 6사단장 다니 히사오는 무주공산이 된 난징에 입성하면서 병사들에게 완벽한 휴가를 선물했다. 태우고 죽이고 강간해도 좋다는 뜻이었다.

▲ ‘목베기 시합’의 두 주역 = 1937년 12월 14일 일본 도쿄니치 니치신문에 보도된 두 일본군 장교 노다 쓰요시와 무카이 도시아키의 중국 민간인 목 베기 시합 지면. 출처 독립기념관 홈페이지

다음날 도착한 무카이 도시아키 중대장이 노다에게 ‘총을 쓰지 않고 중국인 100명 먼저 죽이기’ 내기를 걸었다. 두 중대장은 순식간에 백 명을 죽이고 천황을 향해 절하며 공적을 보고했다. 다른 군인들도 대검을 들고 눈앞에 보이는 중국인을 마구 베기 시작했다. 점점 광분한 일본군은 여자 노인 아이 가리지 않고 보는 대로 베고 찌르고 강간하고 태웠다.

이어 도착한 카야 헤이타로 대대장은 두 중대장의 보고를 받고 무차별 포로 살해를 명했고 부하들은 순식간에 3천명을 죽였다. 이어 우시지마 사다오 사단장이 5만7천명을 죽였다고 보고했는데, 이제 일본군은 먼저 많은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자신의 전과를 자랑하려 했다.

일례로 카야 헤이타로는 국제법상 보호대상인 안전구역 중국인 난민 1만여 명을 가로채 그저 재미로 쏘고 찌르고 태운 뒤 양쯔강에 던져 넣었다. 이런 식으로 6주간에 걸쳐 무차별 살육이 자행되었고 사망자는 35만 명으로 추정된다. 육조시대의 고도 난징은 인간 지옥으로 변했다. 당시 일본 전역이 저 살인극에 무감각했다. ‘일본광선보’는 목베기 시합을 벌여 106명의 목을 벤 자를 ‘승리자’로 대서특필할 지경이었다.

이상이 모두 4권으로 이루어진 이 시리즈의 3권까지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4권에 실린 사진에 대해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히틀러의 나치군도 이 사건에 경악했다. 후일 다니 히사오를 비롯한 전범을 심문한 극동국제법정은 독일군의 기밀전보를 공개했는데, 이런 기록이 나온다.

“이 일본군도 저 일본군도 아니다. 모든 일본군이 바로 죄인이다. (…) 그것은 마치 막 작동하기 시작한 야수기계 같았다.”

이 책을 통해 일본군들이 난징에서 한 짓을 알고 나면, 오늘날 일본이 군사 행동에 들어갈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80년 전 중화민국 수도에서 일본 황국군은 심심해서 악마로 변했다. 그들의 후예인 일본 자위대가 다른 점령지에서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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