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김미영 칼럼니스트] 이렇게 시간이 넘쳐 나는 때 취미가 독서인 이들은 참으로 다행이겠다. 누구는 임영웅 없었으면 어쩔 뻔 했냐며 고마워하고(그에게? tv조선에게?) 누구는 치매 걸린 노견 돌보느라 하루가 빨리 간다고 안도하는데.

▲ 김미영 칼럼니스트

누구는 운동기구 사들여 가뜩이나 좁은 집안을 홈 트레이닝 센터로 개조하시며 정작 스쿼트 한 세트 안 하시고, 누구는 넷플릭스 폐인으로 거듭나 분방한 시청생활 속에 충혈되는 눈동자를 마사지하며 간간히 자기비하에 시달리는데.

신천지 국면엔 달고나 커피라도 있었지, 사랑제일교회 국면이라는 2라운드에는 그마저도 시들하고 소파와의 물아일체 속에 우울이 간당간당 차오르는 지금.

넓은 공간이 필요한 것도, 큰 돈이 드는 것도, 신문물 습득이라는 진입장벽을 넘어야 할 것도 아닌, 다만 적당한 조명 아래 되도록 구석에 틀어박혀 전에 사뒀던 책을 섭렵해간다. ‘꺼내 먹을’ 책이 떨어지면 자기들끼리 방역하느라 바쁘신 공공도서관이 하사하시는 예약 대출 서비스를 이용한다. 참 이상적인 모습 아닌가.

출판사하는 후배가 책이 안 팔려 망할 뻔하다가 코로나로 기사회생했다 한다. 코로나 덕 보는 경우가 있기는 하군. 한 때 모든 이의 취미가 독서 아니면 음악감상이었는데 말이지. 그 와중에 책 값 비싸다는 얘기도 나오는 것이군.

들인 공력으로 보나 잘려나갈 나무들로 보나 책값은 결코! 전혀! 비싼 것이 아니다. 오히려 책값을 올려 떠리로 막 사대지 않고 찬찬히 엄선해 사서 천천히 아껴 보게 되면 어떨까 싶다. 생명체라도 되듯 증식하는 책더미를 보건대.

항상 그렇듯 멍석 깔아놓고 하란 짓은 재미없기 십상. 무릇 소설책이 제일 재미있는 것은 기말고사 기간 아니던가. 각종 사회 사교생활이 취소되어 하루가 통째로 남는데 독서 진도가 팍팍 빠지지 않는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페스트, 콜레라 같은 역병 이야기가 잘 팔린다던데, 정말 그런가? 시대를 숙고하고 선도하는 이들은 그럴지 몰라도 나는 좀 실용적이고 즐거운 쪽으로 눈이 간다. 긴급재난 지원금이 많이 쓰인 데가 가구 등 실내 장식이라잖나.

레몬을 사먹고 나온 씨를 솜에 심어 온갖 정성으로 싹을 틔워 이파리 여남은 장 달린 아이로 키운다. 그걸 여러 친구들에게 나눠준다. 내 친구 딸내미 얘기다. 나도 두 개 얻어걸렸다. 장마 아니라 기후 습격, 이어지는 무더위 그리고 태풍 속에 노심초사 들여다본다.

내놨다 들여놨다 신주 모시듯. 봄에 생협에서 분양받아 꽂아놓은 토마토와 가지는 태평농법이란 이름 아래 썩든 녹든 신경도 안 쓰면서. 수퍼마켓 진열대에 있던 레몬이 싹을 틔운다는 것이 신기하고 기특해서.

이렇듯 식물에 마음을 붙여보려는 이들이 많은지 식물, 나무, 정원 등을 다룬 책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나무의 말, 나무의 노래, 나무의 세계, 나무 이야기, 야생의 위로 등등. 모두 재미있게 읽으...려 했으나 끝까지 읽은 것은 반 정도.

내가 이 계통 최고봉으로 치는 것은 카렐 차페크의 <정원가의 열두달>이다. 우울할 때 한번씩 들춰본다. 흙을 다지고 작은 언덕을 만들고 고무호스로 물을 대고 수백가지 식물을 심고 할 정도 규모의 정원을 가진 이가 몇이나 될까.

실용적인 지침이 아니라 약간의 로망을 들여다보는 건데 위트 넘치는 에세이를 읽는 즐거움만으로도 좋다. 구렁이처럼 꿈틀대는 호스와의 싸움, 이웃 정원과의 시기어린 경쟁, 새 것 심을 곳을 찾아 네 발로 묘기를 부리는 모습, 정작 겨울에나 고개를 들어 정원을 바라보는 정원가.

▲ 경남 남해군 창선면의 한 가정집 정원에 꽃망울을 터트린 장미꽃이 눈길을 끌고 있다./뉴시스 자료사진

이 책으로 차페크를 알게 되어 그의 책을 여러 권 읽었는데 그러는 사람이 많은지 뜬금없이(?) 많이 번역되어 나왔다. 1920년대 로봇(robot)이라는 말을 처음 만들었다니 첫인상과 너무 다르다. 뭐가 부캐야?

나, 산만한 독서가, 대략 너댓권을 걸쳐 놓고 왔다 갔다 하는 자를 사로잡아 단숨에 독파하게 한 책을 모처럼 만났다. <식물학자의 정원 산책>

식물학자라는 말에 좀 방어적으로 시작했는데, 전문 지식이 숙성하면 이런 식의 비유와 위트가 가능한가 경탄하게 한다.

식물이 번식하기 위해 꽃가루받이를 해야 하는데 이것을 곤충을 손님으로 맞는, 저마다 개점 시간이 다른 상점으로 비유한다. 그래서 봄날의 첫 산책의 제목이 “들어오세요, 열렸습니다”이다.

내친 김에 그 쪽으로 가보자. 꿀벌이 사라지면 인류가 멸망한다는 소리를 나도 언젠가 들었다. 꽤 널리 퍼진 얘긴가보다. 저자는 이 말이 딱 맞는 말은 아니라고 한다. (아인슈타인이 하지도 않았고.)

식물의 꽃가루받이 도우미, 그러니까 상점 손님은 꿀벌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식물은 결혼에 골인하기 위해 여러 결혼정보회사에 동시에 신청서를 제출한다. 양봉꿀벌 말고도 야생벌, 뒤영벌, 나비, 나방에게도 도움을 청하고 딱정벌레와 파리 같은 곤충, 새와 박쥐, 도마뱀, 영장류 등등에게도.”(75-6)

나아가 바람, 심지어는 천적에게도. “동전잎메꽃은 아침에 꽃을 피워 정오 무렵만 되면 벌써 문을 닫아걸기 때문에 날씨가 변덕을 부리면 막심한 손해를 보게 된다. 비가 내리면 오라는 벌은 안 오고 물을 좋아하는 달팽이만 들끓는다. 달팽이가 잎을 갉아 먹는 것은 괴롭지만 녀석이 꽃을 스쳐 기어 다니면서 꽃가루를 몸에 묻히는 덕분에 어느 정도는 수분에 도움이 된다.”(78)

잔디라는 모노컬처의 폐해, 물을 물 쓰듯 하는 정원가들의 작태(식물에게도 안 좋다) 등등 마당 가꾸는 이들이 반성해야 할 점도 많지만 가장 감명깊고 가장 실용적이고 훌륭한 지적은 도시 녹지에 대한 것.

“한 지역에 넓은 공원을 조성하기보다 좁은 면적으로 여러 장소에 나무를 심어서 그것들이 모자이크처럼 넓은 녹지를 형성”하는 게 좋다.(175쪽) 녹지조성, 이렇게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전에 있던 식물이 죽어서 노는 큰 통이나 화분에 흙을 가득 담아 내버려 두고 지켜보란다.

▲ 꽃과 나무 등 식물, 그리고 흙과 정원 이야기를 다룬 책들

잡초만 무성하겠지. 그런데 그게 다양한 토착 생물이 잠시 머물다 갈 피신처가 된다는 것이다. 이동하는 중간에 쉬어갈 공간. “도시에서 살아가는 생물들에게는 정원이 넓으냐 좁으냐 하는 문제보다 정원들의 간격이 훨씬 더 중요하다.”(179)

“발코니에 내놓은 화분들과 테라스의 작은 화단, 크고 작은 공원과 정원 등으로 이루어진 초록 모자이크가 긴 통로를 마련해 주면” 도심에서도 시골처럼 많은 종류의 곤충과 식물이 자란다.(179)

서대문구로 이사 와서 인상 깊었던 것 하나는 상점마다 문 앞에 화분을 놓는다는 것이다. 유재석의 유키즈언더블럭에 나온 직후 없어진 연희동 샤론 미용실은 크고 작은 화분을 열 개 넘게 가꾸던 곳이었다.

공들여 화단을 조성한 빵집도 있고 국민 화초라는 제라늄 한 두 개 놓은 사진관도 있다. 항산/ 항심의 기운이 느껴지면서 우리 동네라는 마음이 빠르게 자리잡았던 것 같다.

태풍 올 때는 베란다에 내건 화분들 잊지 말고 걷어들여야 겠지만 저마다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 키우는 마음, 여러 모로 힘든 이 시기를 차분히 살아낼 기운을 내는 것에 맞닿아 있을 것 같다.

※ 김미영 칼럼니스트는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고려대, 홍익대 등에서 강사로 일했고 학술연구교수를 역임했다.

전공은 현대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로 관련 책과 논문을 여럿 발표했으며 섹슈얼리티 문제도 연구했다. 광우병 사태 즈음에 한겨레신문에 칼럼을 연재했다.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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