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의 신간서평

[이코노뉴스=김선태 편집위원] 제갈량은 팔척장신에 풍모가 빼어났다고 한다.

▲ 김선태 편집위원

제갈량의 용모에 대해 “백옥 같은 피부에 흰 학창의와 백우선을 가진 모습이 신선과 같다”는 기록이 있다. 달리 제갈량은 깡마른 체구에 피부는 말라비틀어진 나무껍질 같았으나 눈빛에 힘이 있으며 기품이 넘쳤다는 기록도 있다.

제갈량을 영입하자 관우와 장비가 불만을 품었는데, 유비가 그들에게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격(水魚之交)’이라고 하여 그들의 불만을 눌렀다. 후일 수많은 동반자들이 자신들의 관계를 이 성어로 표현하게 되었다.

제갈량이 운남 지역을 정벌하고 오는 길에 노수에서 심한 풍랑을 만났다. 맹획이 풍습에 따라 마흔아홉 사람의 머리로 제사를 지내야 풍랑이 멎는다고 하자 제갈량이 사람 머리 모양의 밀가루로 제사를 지낸 것이 오늘날 만두(교자, 饺子)의 시초라고 전해진다.

제갈량은 군법을 냉혹하게 적용했다. 유비가 매우 아끼던 인재이자 자신의 친구인 마량의 동생 마속조차 가정 전투의 책임을 물어 참수할 정도였다. 당시 국정의 동반자였던 법정(法正)이 나서서 우려를 전하자 제갈량은 “은혜와 영화가 동시에 가지런해야 상하에 법도와 질서가 생기는 것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핵심은 바로 여기에서 나타나는 것”이라 답했다. 정사의 평가도 이에 합치된다.

▲ 『제갈량 문집』= 제갈량 지음. 조영래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충성을 다하고 시대를 이롭게 하는 자는 원수라 할지언정 상을 주었다. 법을 범하고 게을리 하는 자는 친구라 할지언정 벌을 주었다. 죄에 굴복하고 정을 다하는 자는 반드시 용서했다. 언사를 뒤집고 교묘하게 꾸며대는 자는 죄가 가볍다 해도 죽였다. 선은 미미해도 반드시 칭찬했고, 악은 미미해도 반드시 배척했다. (중략) 드디어 나라 안에서 누구나 두려워하며 그를 사랑했다. 형정(刑政)이 엄준해도 원망이 없었음은 그의 심성이 평온하여 권계(勸戒)가 명료한 탓이다."

 

전반적으로 제갈량의 법 집행은 엄격하나 공명정대했고 잘못을 저지른 자에게도 늘 기회를 주어 당사자들이 마음으로 승복하게 만들었다. 이에 관해서는 진나라 대학자 습착치가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옛날 관중이 백씨의 병읍 삼백을 빼앗았으나 백씨가 죽을 때까지 원망하지 않아 성인도 그것을 어렵게 생각했다. 제갈량은 요립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고, 이엄을 죽음에 이르도록 했으니, 어찌 단지 원망에서 그러했다 말할 수 있으리오.”

 

여기 등장하는 요립은 장사군 태수 출신으로 방약무인한 행동이 도를 넘어 제갈량에 의해 문산군으로 유배되었으나 제갈량이 “양이 양의 무리를 문란하게 하는 것도 양을 헤치는 것이다. 그런데도 요립을 높은 직위에 둔다면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진위를 구별할 수 있겠는가?” 하며 다시는 중용하지 않았다. 그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병사했다는 말을 듣고 요립은 “내가 끝내 오랑캐가 되고 말게 생겼구나” 하며 통곡했다.

 

제갈량은 또한 자신을 모함해 북벌 실패의 책임을 피하려 하던 표기장군 이엄을 평민으로 삼고 재동군으로 유배시켰는데, 이엄은 제갈량의 죽음을 듣고 귀양지에서 비통해 하다 분노가 치올라 화병으로 죽었다. 그들은 제갈량이 공명정대하므로 언젠가 다시 기회를 얻어 복귀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차에, 그가 죽으니 다시는 그와 같은 흉금과 식견을 기대할 인물이 나지 않으리라 보아 한탄했던 것이다.

제갈량은 사후 자신의 유언대로 한중의 정군산에 매장되는데, 생전 청렴하고 축재를 하지 않아 집에는 뽕나무 밭과 척박한 농토 약간 만이 있었다. 그가 후주에 올린 표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신이 처음 선제를 모실 때, 높은 관직을 주시어 스스로 생업에 힘쓰지 않아도 되도록 하셨습니다. 이제 성도에 뽕나무 800 그루와 척박한 땅 1500무가 있으니, 자제들이 먹고 입는 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중략) 만약 신이 죽는다면, 안으로 남는 비단이 없게 하시고 바깥으로 남는 재산을 없게 하시어 폐하께 부담을 주지 않도록 하길 원하나이다.”

그가 죽으니 생전의 청렴함이 그가 말한 대로 입증되었다.

제갈량은 인간관계에 신중을 기했지만 한 번 맺은 우정은 평생을 유지했으며 재상이 된 뒤에도 은둔 중이던 초기에 만난 벗들과 격의 없이 만나 의견을 들었다. 제갈량이 쓴 ‘태평어람’이라는 글에 이러한 교류관이 잘 나타나 있다.

“권세와 재물로 사귄 벗은 오래 갈 수 없다. 사인(士人)의 교우 관계는 마치 날씨가 따뜻해도 꽃을 더 피우지 않고, 날씨가 서늘해도 나뭇잎이 시들지 않는 것과 같다. 이러한 우정일수록 사시사철 모두 쇠락하지 않으며 온갖 어려움을 통해 더욱더 견고해지는 법이다.”

▲ 흰 학창의와 백우선을 쥐고 진형을 누비는 제갈량. 삼국지연의를 통해 한국인들에게 익숙해진 제갈량의 이미지이다.

제갈량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전장에서 죽었지만 그가 남긴 업적은 후대 중국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문장을 빼놓을 수 없다. 충절의 염 가득한 출사표가 그렇고, 계자서(誡子書)의 명문이 그렇다. 계자서는 마지막 북벌에 나선 제갈량이 아들 첨에게 학문하는 자세를 가르치기 위해 쓴 편지글로 사실상의 유훈이다. 아래는 그 일부.

무릇 군자의 삶이란

고요한 마음으로 몸을 닦고 검소함으로써 덕을 기르는 것이다.

마음에 욕심이 없어 담박(澹泊)하지 않으면 뜻을 밝힐 수 없고,

마음이 안정되지 않으면 원대한 이상을 이룰 수 없다.

배울 때는 반드시 마음이 안정되어 있어야 하며,

재능은 반드시 배움을 필요로 한다.

배우지 않으면 재능을 발전시킬 수 없고,

마음이 고요하지 않으면 학문을 성취할 수 없다.

방자하고 오만하면 정밀하고 미묘한 이치를 깊이 연구할 수 없고,

조급하고 경망하면 자신의 본성을 제대로 다스릴 수 없다.

이치를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본성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사이에

나이는 시간과 함께 달려가고, 의지는 세월과 함께 사라져

마침내 가을날 초목처럼 될 것이다.

그때 가서 곤궁한 오두막집에서 슬퍼하고 탄식해본들 어찌할 것인가?

‘담박’이라는 표현은 맑은 마음가짐, 풀이하여 깨끗하고 고요함을 유지해 스스로 담담함을 이루는 경지를 뜻한다. 후에 청나라 황제 강희제는 1703년 허베이성 청더시에 피서산장이라는 여름 별궁을 짓기 시작했는데, 그 본관에 해당하는 정전이 담박경성전이라 불린다. 이곳에 강희제가 친히 ‘담박경성(澹泊敬誠, 담백하고 검소하며 욕심 없이 백성을 공경하고 통치하라는 뜻)’이라 쓴 편액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강희제 역시 제갈량의 계자서를 지침으로 삼았던 것이다.

계자서에서 비롯한 ‘담백명지 영정치달(澹泊明志 宁静致远) 즉 “담박하지 않으면 뜻이 밝지 못하고, 고요하지 않으면 멀리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은 제갈량 사유의 심원한 경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오늘날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고사성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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