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의 신간서평

[이코노뉴스=김선태 편집위원] 제갈량의 공적인 삶은 크게 형주 시절, 입촉과 유비가 죽기 전, 그리고 유선 대의 남정과 북벌 시기로 나눌 수 있다.

▲ 김선태 편집위원

그의 초기 활동 무대를 오늘날 행정구역으로 살피면 산동성 기남현, 호북성 양번시 융중, 사천성 성도시, 섬서성 면현이 된다. 군사적 정치적 활동 범위는 북으로 감숙성과 섬서성, 동으로 장강 중하류, 남으로 귀주와 운남에 이른다.

후한 말 전란의 시대에 형주의 초야에서 지내던 중 유비의 삼고초려로 세상에 나온 제갈량은 지략과 실천으로 유비를 도와 촉한을 건국하는 데 앞장섰다.

당시 유비는 여남에서 조조에게 패한 뒤 유표에게 의탁하고 있었는데, 제갈량에 대한 소문을 듣고 삼고의 예를 갖춘 끝에 제갈량을 영입했다. 당시 27세이던 제갈량이 자신의 집을 거듭 찾아 이른바 삼고초려한 유비에게 내놓은 계책이 유명한 ‘융중대책’ 또는 ‘천하삼분지계’이다. 아래는 그 일부로 원문은 ‘제갈량집’ 초려대 1권에 실려 있다.

“장군이 만약 현주와 익주를 동시에 차지한다면 지형적 장애에 의존하면서 서쪽으로 융과 화합하고 남쪽으로 이와 월을 무마하며, 바깥으로 손권과 사이좋게 지내면서 안으로 내치에 힘쓸 수 있습니다.

그러다 천하에 변고가 있을 때 한편으로는 상장군에게 명령해 형주의 군대로써 완을 거쳐 낙양으로 진격해 들어가게 하고, 장군은 손수 익주의 무리를 이끌고 진천에서 출발한다면, 백성들 중 누가 감히 소쿠리밥과 물병을 들고 장군을 환영하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이렇게만 된다면 패업을 이룰 수 있으며 한 왕실을 다시 일으킬 수 있습니다.”

▲ 『삼국지 강의』= 이중톈 지음. 김성배, 양휘웅 옮김. 김영사.

융중대책의 절묘함에 대해 이중톈은 『삼국지 강의』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제갈량의 말을 듣고) 유비는 마음이 후련해지면서 막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눈앞이 환해졌다. (...) 제갈량의 계획에 따르면 유비는 나아가서는 중원을 통일할 수 있고 물러나서는 천하를 삼분할 수 있으니, ‘제업(帝業)’은 이루지 못해도 ‘패업(霸業)’은 이룰 수 있고, 패업은 이루지 못해도 ‘사업(事業)’은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제갈량의 해박한 지식에 대해서는 거의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와 관련하여 유비가 남긴 말이 있다. 촉한 건흥 원년 223년 유비는 죽음을 맞아 유선에게 유조, 즉 임금의 유언으로 아래와 같이 명했다.

“한서, 예기를 읽다 틈이 날 때 제자백가의 책이나 육도, 상군서를 훑어본다면 더욱 뜻과 지혜가 길러질 것이다. 듣건대 승상께서 신자(申子), 한비자, 관자, 육도를 베껴 쓰면서 그 뜻에 전부 통했다 하고 그밖에도 읽지 못한 책이 없다 하니 네가 물어보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학문적 깊이와 성취가 있었기에 208년 조조의 침공으로 유비가 형주를 버리고 달아나려 할 때 제갈량은 ‘위험한 상황에서도 명을 받들어’ 홀로 동오를 찾아 심금을 울리는 말과 글로 촉오동맹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당시 제갈량이 손권에게 올린 글 가운데 오월동주의 고사를 인용해 동맹이 불가피함을 설파한 다음 구절은 삼국 시기 외교 논리의 백미로 꼽힌다.

“조조는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천 리 길을 달려 급습해왔으며, 여기까지 쇄도하느라 이미 힘이 다 빠진 상태인데 전투력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북방 출신들은 수전에 익숙하지 않은데 전투력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유종의 부대가 조조에게 투항한 것은 원래 압력 때문이지 결코 마음으로 기뻐하며 복종한 것이 아닌데, 또 전투력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전황이 이러하므로) 장군께서 만약 오월의 무리로 중원에 대항해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면 일찌감치 중원과 관계를 끊는 편이 나을 터인데, 만약 감당할 수 없다면 어찌 군대를 물리고 무기를 단속해 중원을 섬기지 않으십니까?”

이 지점에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제갈량이 평생 일관되게 왕실의 중흥과 조적(조조)의 타도를 외친 데는 그 자신과 조조의 악연이 무관하지 않다.

제갈량의 고향은 서주 낭야군 양도현으로 삼국 당시 도겸 치하에 있었다. 헌제 흥평 원년 194년 여름, 조조가 2차 서주 공략에 나섰는데 이 때 도겸은 유비의 도움으로 조조를 간신히 물리쳤다. 당시 유비의 후원자인 공손찬이 유비를 별부사마(別部司馬)에 임명하고 청주자사 전해와 함께 기주목 원소와 싸웠는데, 유비가 자주 전공을 세웠으므로 평원상에 임명했다. 이윽고 조조가 서주를 정벌하자 서주목 도겸이 전해에게 구원을 요청해 왔으므로 유비는 전해와 함께 도겸을 도운 것이다.

조조는 아버지 조숭이 탐욕에 눈 먼 도겸의 부하 장기에게 죽자, 그 원한을 도겸에게 돌려 애꿎은 서주를 침공한 것이다. 비록 조조가 물러가기는 했지만 무자비한 살육과 파괴로 서주는 가옥이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황폐해졌고 백성들은 태반이 죽거나 달아나야 했다.

이로 인해 흥평 2년 195년, 제갈량은 숙부 제갈현을 따라 남쪽으로 피난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 열네 살이다. 삼국지 위지 장수전에 따르면 당시 조조의 만행으로 서주는 “천하 호구 열 중 하나가 겨우 살아남을” 정도로 피폐해졌다. 심지어 조조 조차 “백골이 들판에 나뒹굴고 천리 안에 닭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구나. 살아 있는 백성이 백에 하나니, 생각만 해도 애간장이 끊어질 정도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 중국 백제성의 무후(제갈량) 사당. 백제성은 유비가 죽음을 맞아 후사를 제갈량에게 맡긴 곳이다.

특히 제갈량의 고향인 낭야 일대가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낭야는 조조군이 남하하면서 거쳐간 길목으로, 194년 여름 조조군은 두 번째 서주를 공격하면서 “군대가 지나가는 곳은 남김없이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때문에 인적이 끊어지고 건물은 잿더미로 화해 낭야는 복구 불능의 폐허가 되었다. 이로써 제갈량은 돌아갈 고향을 잃은 것이다.

제갈량이 전란에서 목숨을 부지해 남하했는데 그 와중에 형제가 생이별을 당했다. 형 제갈근은 계모와 함께 묘지를 지키고자 고향 양도현에 남았다. 제갈근이 후일 강동으로 건너가 손권의 모사로 활동하게 된 배경이 이러하다.

제갈량이 융중에서 유비를 섬기기로 결심하고 조조를 극도로 증오한 이면에 그 자신의 끔찍한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융중은 동한 정권을 세운 광무제 유수의 고향이기도 해서, 제갈량이 천하 대업을 융중에서 구상할 때 한 편 정치적으로 또 한 편 지리적으로 배경이 되어 주었다.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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