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의 신간서평

[이코노뉴스=김선태 편집위원] 제갈량(諸葛亮, 181~234년)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공신이다. 자는 공명(孔明)이며, 별호는 와룡(臥龍)·복룡(伏龍)이다.

▲ 김선태 편집위원

서주 낭야군 양도현(지금의 산동성 교남시 일원)에서 지방관이었던 제갈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친형은 제갈근이고 친동생은 제갈균이다.

 

회남의 예장(지금의 남창)과 형주의 주도인 양양에서 어린 시절과 청년기 12년을 보냈으며 15세가 되기 전 양친을 잃었다. 이에 한동안 백부 제갈현이 예장에서 제갈량을 돌봤다. 197년 제갈현이 죽자 거처를 옮겨 형주 땅 남양군 등현(융중)에 머물렀는데 스스로 농사를 지었고, 양보음이라는 노래를 즐겨 불렀다.

당시 형주는 난세를 피해 온 명망 높은 선비들이 많았는데, 제갈량은 이들과 교류하면서 인맥을 넓히고 지식을 쌓았다. 융중에서 교류하여 우정을 쌓은 인물이 많으니, 후일 유비에게 그를 와룡이라 소개했다는 서서(徐庶)가 그 중 하나다. 27세에 유명한 삼고초려를 계기로 융중을 나와 익주 성도를 중심으로 유비를 도와 촉한을 세웠다.

제갈량이 당대의 수많은 군웅들 가운데 유독 세가 약하여 ‘버티고 설 땅 한 뼘 없었던’ 유비를 주군으로 삼은 이유는, 후한 말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고자 한 그의 정치적 이념에 유비가 가장 부합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 송나라의 배송지는 ‘삼국지 주석’에 이렇게 기록했다.

- 제갈량은 황제의 권위가 이미 실추되어 한 왕조가 기울어지려 할 때 종친 중 걸출한 인물을 도와 끊어질 듯한 왕조를 다시 일으켜 옛 수도를 회복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당시 유비는 원소를 정벌하고 남하하는 조조에게 맞설 수 없어 남으로 도망가야 할 처지였는데, 이때 제갈량은 손권에게 도움을 청하고자 자진하여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손권은 제갈량의 요청에 응해 유비와 동맹을 맺었으며, 적벽에서 당대 최강의 제후인 조조를 격파한다. 209년 겨울이다.

 

▲ 『제갈량 평전』= 여명협 지음. 신원봉 옮김. 지훈.

제갈량은 이 과정에서 형양을 차지한 뒤 익천을 도모해 유비를 제위에 오르게 하고 자신은 승상의 직에 오른다. 유비 사후 후주 유선에게 출사표(出師表)를 올린 뒤 중원을 도모하였으나 적수 사마의와 대결하다 오장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연의의 서술과 달리 정사에서는 제갈량이 적벽대전 당시 어떠한 일을 했는지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선주전’에 조조를 적벽에서 격파하고 남군까지 추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산양공재기’ 또한 유비가 조조를 화용까지 추격했다는 기록이 있음을 본다면, 당시 유비군이 맹위를 떨쳤고 제갈량이 유비의 군사참모로 활약했음이 짐작된다.

이후 유비의 형남 4군 정벌에서도 제갈량이 어떠한 일을 했는지에 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나 “군사중랑장이 되어 내정에 힘썼다”는 정사의 기록으로 미루어 당시 이미 유비의 측근 참모로 활약했음을 알 수 있다.

연의에서는 방통이 죽자 군대를 이끌고 참전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정사에서는 유비와 방통이 부수관에서 성도로 향할 때 형주에서 호응하여 서쪽으로 진군했다는 기록이 있다.

214년 유장이 항복하여 파촉은 유비의 손에 들어가고 제갈량은 ‘군사장군’에 임명되었다. 이후 제갈량은 승상이 되기 전까지 이 직위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한중 공방전을 치르기 전 위나라 조정에서 제갈량의 존재를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들어 제갈량이 입촉 당시 혹은 유비가 죽기 전까지 한직에 머물렀다고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

하지만 정사인 가후전에 조조가 한중 공략에 앞서 이미 “제갈량의 정치력이 뛰어나다”고 평가한 대목이 있다. 또한 황충의 경우 유비가 한중왕이 되기 전까지 좌장군이었지만 한중전 당시 하후연을 전사시켜 좌장군보다 높은 정서장군에 올랐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군사장군이 임시직이긴 하나 유비가 일찍이 그에게 상당한 권한을 부여했으리라 볼 수 있다. 일례로 법정과 함께 새로운 법률인 촉과를 만드는 등 익주의 제도 정비를 주도한 이가 제갈량이다.

유비가 한중왕이 된 뒤에도 계속 군사장군으로 머물러 있었지만, 221년 촉한(蜀漢)이 서고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제갈량은 조정의 수장인 승상(丞相)이 된다. 223년 유비가 백제성에서 붕어할 때 이엄과 함께 탁고를 받았다.

유비(선주)가 죽고 유선(후주)이 황제로 즉위한 뒤 오장원에서 사망할 때까지 제갈량은 승상으로 14년간이나 있었다. 당시 익주 남쪽의 호족이었던 옹개·고정·주포 등이 손권의 밀지를 받고 소란을 피우자, 제갈량은 225년 봄 남정을 개시하여 그 해 가을 반란을 평정한다.

올돌골이나 목록대왕 등의 일화는 연의의 창작이지만 맹획은 실존인물이다. 남중 반란은 유언과 유장 부자 통치 당시 중앙 통제에서 벗어난 남부 지역 이민족과 토착 호족들의 반란이며, 유비가 한중을 정벌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을 당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엄에게 평정됐다.

이어 유비 사후 손권의 사주로 일어난 반란은 제갈량이 유명한 칠종칠금 일화를 남기며 평정했다. 이는 조조가 모사 곽가 덕에 북방 오환족을 궤멸시킨 일과 더불어 당대에 이민족과의 대결에서 압승을 거둔 양대 사건이라 불릴 만하다. 당연히 숱한 민간전승이 생겨나 연의에서 마치 신화처럼 묘사되는데 정사에도 남만정벌과 칠종칠금은 개략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 초기 제갈량 초상, 1609년 명나라 시기 작품으로 널리 통용되는 제갈량의 모습이다.

227년 제갈량은 위를 정벌하라는 유비의 유지를 받들어 군사를 일으켰다. 출진하기에 앞서 올린 상주문은 원문 350자인데 그 내용은 먼저 제갈량이 살아 돌아오지 않을 것을 각오하며, 덧붙여 어린 황제에게 몇 마디로 훈계하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후일 ‘출사표’라 불리는 이 명문을 읽고 울지 않는 충신이 없었다 한다.

228년 봄 제갈량이 기산을 침공하자 남안과 천수, 안정 3군이 호응하고 강유가 제갈량에게 귀순한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마속이 제갈량의 지시에 어긋난 행동을 해 장합에게 대패했다. 제갈량은 울며 마속을 처형하고(泣斬馬謖 또는 揮淚斬馬謖) 스스로 우장군으로 지위를 낮추면서 승상의 사무를 대행한다.

같은 해 겨울 제갈량은 다시 위나라를 침공해 진창을 포위하지만, 학소의 저지선을 뚫지 못한 데다 식량이 다 떨어져 귀환했다. 이때 추격해온 왕쌍을 물리친다.

229년 제갈량은 다시 위나라의 영토를 침공해 곽회를 격파하고 무도와 음평을 평정하여 그 공로로 승상에 복직했다. 231년에도 기산을 침공하여 상규에서 사마의의 대군을 대파시킨다. 그러나 식량이 떨어져 퇴각했고, 그때 추격한 장합을 목문에서 죽인다.

234년 제갈량이 10만 대군을 통솔해 오장원에 본거지를 구축하자 사마의는 지연전을 펼쳤다. 제갈량은 손수레(목우와 유마)를 사용해 식량을 수송하고, 식량 공급이 끊어지지 않도록 병사를 나누어 둔전을 시행한다. 하지만 100여일 후인 그 해 8월 병으로 쓰러져 진중에서 죽으니 향년 54살이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사마의를 속여 사직을 보존한 그의 지략은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쫓아냈다’는 말로 후대에 길이 기억되고 있다.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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