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김미영 칼럼니스트] 사람들이 마동석을 좋아한다는 것 하나만은 알겠다. 그가 나오는 매 장면에서 관객들은 실없이 웃어대니 어서 우릴 웃겨 달라고 채근하고 조바심내고 앞질러 웃어 버리는 형국이다. 눈썹을 치켜 뜨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표정이나 믿을 수 없이 우람한 팔근육에도 사람들은 웃는다.
하긴 나도 이런 ‘남자영화’(굵은 눈썹의 남자들이 눈을 희번덕 뜨는 포스터로 판별됨)를 전혀 안 보는데 마동석이 무척 재밌다는 말에 움직였으니.(집단행동론에서 말하는 밴드왜건·bandwagon 효과라고나 할까.) 그러나 그의 매력에 아직 눈 뜨지 못한 나는 그저 “혼자여? 응 싱글이여”라는 결정적 한 방을 두어 시간 기다린 기분.
그냥 무료하게 기다린 거면 낫겠다. 큰 화면에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근육질의 향연이 나의 감각기관에 가하는 공격을 버퍼링 하느라 나의 신경줄은 풀가동되었고 영화를 관람하는 게 아니라 가상공격을 막아내는 듯 앉은 자리에서 용을 써대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뒷목과 어깨가 뻐근했다. 영화의 흡인력이 강한 건가?
소격효과가 없기는 했다. 외국인도 아니고 총이나 변신자동차나 하다못해 원자폭탄 버튼도 없이 그저 동족의 얼굴들이 칼과 도끼와 망치, 나아가 끓는 물 같은 생활형 흉기로 그악을 떨어대니 이건 뭐 킬링타임이 아니라 실제 상황? 가령 <킹스맨>은?
1편에선 사람 머리가 무슨 풍선 터지듯 장중한 음악 속에 팡팡 터지더니 2편에선 사람을 통째로 갈아 햄버거 패티로 만든다. 그런데 그 와중에 나는 구두나 옷까지 함께 갈면 고기 맛이 덜하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뭐 그렇게 비폭력의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초반에는 무슨 스토리 같은 걸 기대하기도 했다. 윤계상이 제법 포스 넘치는 외양으로 등장하니 나쁜 남자에게 매혹당할 준비를 해 가면서. 그러나 그는 그냥 나쁜 놈. 폭력에도 이유나 사연이 있어야 되는데, 처음엔 사채 대신 받아내느라 손목을 자르고 뭐 그런 이유라도 대더니 폭력이 눈길 구르듯 커지며 굴러가니 이야기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어진다.
사람이 뭐를 하든 다 이유가 있고 전술 전략이 약간은 들어 있게 마련이다. 폭력도 그렇다. “기대 편익이 기대 비용을 넘어서는 상황에서만 폭력을 쓰는” 것이 전략적이고 진화에도 도움되고 자기생존에도 이롭다. 그런 어떤 계산과 비례성을 넘어서는 폭력은 아둔한 폭력, 자기패배적 폭력, 아니면 목적 자체로 된 폭력이다.
왜 윤계상은 그렇게나 폭력적인가. 한국 경찰의 손바닥 위에서 한국 조폭과 조선족 조폭이 적대적 공존을 하며 찰랑찰랑 유지되던 밸런스를 우악스럽게 깨고 들어온 새로운, 외부의, 절대적 악. 환상의 삼각관계를 단번에 휘저어버리는 제4의 힘.
안 범죄도시를 범죄도시로 만든(?) 범죄자들. 그런 절대적 타자는 아니나 다를까 중국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튄 인간 말종.
왜 그는 그렇게나 폭력적이어야 하는가. “적을 무한한 악으로 둔갑시킴으로써 무한한 처벌을 허락한다.” 이것은 스티븐 핑커가 이데올로기를 두고 한 말이지만 이 영화 <범죄도시>의 장치이기도 하다. 적을 굉장한 범죄자로 만들어서 경찰의 폭력을 정의롭게 만든다.
경찰의 심문 장면을 보라. 결정적 순간에 커튼을 친다던가, 사과박스로 감시 카메라를 가린다. 사람들은 웃는다. 소리만으로 퍽퍽 윽윽. 사람들은 또 웃는다. 그런데 그건 강압수사이고(가벼운?)고문이다. 고문을 웃으며 마음 편하게 보려면 고문당하는 자들이 절대악이어야 한다. 그들이 저지른 끔찍한 범죄에 비하면 주먹 몇 대 발길질 몇 번 대수냐는 어떤 계산과 회복적 정의감. 나의 산수는 좀 달랐는지 마음 편히 웃지 못했다.
고문을 정당화하는 시한폭탄 시나리오 상황이란 게 있다. 어딘가 시한폭탄이 장치되어 있고 재깍재깍 초침은 흐르고, 폭탄이 터지면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죽을텐데 범인은 빙글거리며 게임을 하자 들면, 답은 고문이다. 어디서 한가하게 인권을 외치고 과학수사를 외치고 그러냐?
그런데…밤낮을 가리지 않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열일하시는 우국지사들 눈에는 정부 정책에 어긋나는 영화나 레인보우 퍼레이드도 시한폭탄 상황이다. 냉정하게 전문적으로 압도적 폭력을 써 시국사범을 다뤘을 고문 경찰관의 머리 속에서도 시계 바늘 초침은 째깍째깍 돌았을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경찰의 폭력이 불편하다. 중국산 인간 말종을 때려 잡고 질서를 회복한다는 이유를 앞세워도 말이다. 미안하다. 웃자고(?) 만든 영화에 죽자고 덤볐다.
※ 김미영 칼럼리스트는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고대, 홍대 등에서 강사로 일했고 학술연구교수를 역임했다.
전공은 현대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로 관련 책과 논문을 여럿 발표했으며 섹슈얼리티 문제도 연구했다. 광우병 사태 즈음에 한겨레신문에 컬럼을 연재한 경험이 있다. 지금은 강사를 그만 두고 다양하게 읽고 다니고 보는 생활을 하고 있다. [이코노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