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영의 길과 사람 사이

[이코노뉴스=김미영 칼럼니스트]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을 나는 영화로 먼저 접했다. 안소니 홉킨스와 엠마 톰슨이 나온다. 이번 노벨상 수상 소식에 책도 구해 읽어봤다. 남아 있는 나날이 조금 줄어든 나는 <남아 있는 나날>이 안겨주는 고요한 슬픔을 좀 정리하고 싶어졌다.

▲ 김미영 칼럼니스트

주인공 화자는 스티븐스라는 집사, 때는 2차대전 끝난 지 십여 년. 그가 수십년 집사로 일한 달링턴 성이 미국인 사업가에게 팔려 이제 그는 인생 말년에 새 주인을 모셔야 하는 처지. 한 때 삼 십여 명의 스태프가 일하던 “웅장하고 유서 깊은 영국 저택”을 달랑 네 명으로 관리하는 미션과, 리버럴한 새 주인의 농담에 응대하는 미션 (임파서블)을 맞고 있다.

그런 전환기에 그는 미국인 주인이 내 준 포드 자동차를 끌고 난생 처음 장거리 여행을 나선다. 겸사겸사 한창 때 집사와 하녀장으로 손발을 맞춘 캔튼 양을 방문해 복귀 의사를 타진할 요량이다.

집사라면 하찮게 느껴지나? 천만에. 그것은 전근대 사회에서 ‘전문직’이다. 미로 같은 복도와 층계로 연결된 수많은 방들, 거대한 연회장, “전기와 현대식 난방장치”가 없는 가운데 그 건조 환경을 유지 관리한다고 생각해보라. (크고 번듯한 집을 보면 그 위용에 감탄하기보다 저걸 청소하려면 얼마나 뼈 빠질까 부터 떠오르는 나는 전생에 하녀?)

주인 식구 몇 명만 있다가 사냥이나 사교 시즌이면 밀려드는 인원을 수용해 먹이고 입히고 수발 들어야 하는 일, 더구나 신분사회의 인격적 지배 속에 각급 윗 전을 모시는 일이란…(영화 <고스포드파크>에서 잘 그려짐.) 그 총책임자가 집사다. 스티븐스는 그 집사 일을 훌륭하게 해 위대한 집사가 되려 일구월심하는 사람이다.

위대함과 집사직은 개 발에 편자 느낌? 유능하다면 모를까 위대함은 좀 과한데? 일본인이라면 좀 다르게 느낄 것이, 그들에겐 천하제일(덴카이치·天下一) 사상이란 게 있다. “과거제와 같은 신분 상승의 루트가 애초부터 폐색된 채 자신의 위치와 자리에 만족하며 주어진 재능에 차분하고도 열심히 집중”하여 최고가 되자는 것(김영민, <집중과 영혼>, 354쪽).

▲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있는 나날, 송은경 옮김, 민음사 발간

스티븐스는 묻는다. “위대한 집사란 무엇인가(what is a great butler?)” 이 질문은 우리 현대인에게 좀 어색하게 들린다. 집사가 물건인가? 왜 who가 아니라 what이지? 레이몬드 윌리엄스가 <기나긴 혁명>에서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설명하며 든 일화에도 what이 등장한다.

“손더스(치안판사): 당신은 무엇입니까?

피고인(윌리엄 모리스): 나는 예술가, 문필가입니다. 내 생각에는 유럽 전역에 꽤 알려져 있지요(132쪽).”

우리 현대인이 그런 질문을 받았다면 인간이다! 어쩔래? 할 도리밖에 없다. 사람을 직업, 사회적 기능, 사회적 지위에 의거해 보는 사회, 그 역사단계에서 우리는 떠나왔기 때문이다.

스티븐스는 집사라는 직업, 사회적 기능을 잘 해내려는 사람이다. 그의 야심은 원대하다. 위대함이란 한낱 기술적 완숙, 극도로 유능함(extremely competent)을 뛰어넘는 것이기에. 위대함은 ‘품위(dignity)’라는 말로 등치된다.

그렇다면 품위있는 집사란? 집사라는 역할에 완전 녹아든 사람이다. “판토마임 연기하듯 조금만 흔들어도 가면이 벗겨져 배우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라도 “그가 그 안에 거주하는 프로페셔널의 삶을 내버리지 않는 능력(a butler’s ability not to abandon the professional being he inhabits)”을 가진 이이다. 가령 호랑이가 식탁 아래 있어도 평정을 유지한 채 주인에게 총을 빌려 처리하고 평소대로 식사가 서빙될 거라 고지하는 집사.

▲ 영화 ‘남아 있는 나날’의 한 장면/구글 이미지 캡처

집사 역에 욱여 넣어지지 않는 것들은 가차없이 잘라낸다. 스티븐스는 업계 선배이자 위대한 집사의 모델로 꼽던 자기 아버지의 임종(한 지붕 아래 있으면서도)을 하지 못한다. 프랑스 귀족의 발 병을 수발 드느라. 하녀장의 부드러운 접근을 직업적 협력관계로만 이해했고 혼자만의 밀당 속에 결혼 엄포까지 날린 그녀를 예의바른 축하인사로 떠밀어낸다. 그렇게 단 하나의 사랑을 잃는다.

아들 구실, 연인의 행복은 집사직에 거치적거리고 필요 없지만 의미 없는 과잉이라 할 순 없다. 우리는 로봇의 봉사를 위대하다고 하지 않는다. 그 이탈과 과잉은 ‘~에도 불구하고 성실히’의 형식으로 집사의 품위를 담금질하고 돋보이게 하는 구성적 외부라 할 수 있을지.

그는 이제 귀족으로 오해받을 정도로 행동거지가 점잖고 윈스턴 처칠 같은 저명인사들이 등장하는 일화로 여행길에서 만난 촌부들의 경탄을 사며 세계의 운명을 좌우할 중대한 일에 일익을 담당했다고 자부한다.

그가 위대한 집사가 된 것인가? 주인 패거리들이 민주주의를 조롱하느라 던지는 어려운 정치외교 문제에 “저로선 도움을 드리기 어렵습니다”를 연발하며 평정을 유지하는 스티븐스. “집사의 의무는 훌륭하게 봉사를 하는 것이지 중대한 나랏일에 끼어드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하는 스티븐스.

그런 그가 위대하려면 주인이 위대해야 한다. 기능적 위계의 소우주는 그 전체의 텔로스에 의해 덕성이 결정된다. 그것이 개인의 비극이다. (아니 어느 정도로 성찰성을 발휘하란 말인가?)

▲ 가즈오 이시구로/AP=뉴시스 자료사진

그 주인이라는 이는 1차대전 후라는 시대에 걸맞지 않게 ‘순수한’ 사람이다. 스테판 츠바이크의 <어제의 세계>를 보라. 1차대전과 2차대전을 맞는 대중의 태도가 얼마나 다른지. 그 모든 이상과 열정이 1차대전의 진흙탕 속에서 박살났다는데 이 귀족나리는 여전히 순수하다.

예비신랑인 대자에게 첫날밤의 비밀을 차마 말 못해 스티븐스에게 일임하는 그 순수함으로 달링턴 경은 1차대전에서 싸운 것은 세계의 정의를 위해서였고 이미 패배한 게르만 민족에게 복수를 해서는 안 된다고 나댄다. ‘신사 아마추어’는 히틀러에게 놀아난다. 친독파에서 나치로의 길은 짧다. 전후 신문사와의 명예훼손 소송으로 온 세상에 나치라고 커밍아웃한 나치.

달링턴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잡아뗀 그는 남아 있는 나날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영락한 귀족 저택에 끼워 팔린 집사, 귀족 놀음의 미장센을 완성하며 미국인의 호사취미에 활용되는 오리지널 영국집사, 그의 현안은 주인의 농담에 여하히 적절히 대응할 것이냐이다. 그는 여전히 최선을 다할 것이다. 사랑도 동료도 없이 홀로.

그러나 깃대 잃은 프로페셔널리즘은 석양 빛이 스민 아름다움을 간혹 던질 뿐.

그러나 달리 어쩌겠는가.

※ 김미영 칼럼리스트는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고대, 홍대 등에서 강사로 일했고 학술연구교수를 역임했다.

전공은 현대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로 관련 책과 논문을 여럿 발표했으며 섹슈얼리티 문제도 연구했다. 광우병 사태 즈음에 한겨레신문에 컬럼을 연재한 경험이 있다. 지금은 강사를 그만 두고 다양하게 읽고 다니고 보는 생활을 하고 있다.[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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