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진의 청호칼럼

[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카페나 식당에 가면 음료나 식사를 주문하고 먼저 계산부터 하라.”

1980년대 브라질 아르헨티나의 살인적 인플레이션 시절 한국 교민들이 한국 관광객들에게 우스갯소리로 하던 말이었다. 커피나 음식을 먹는 동안 돈의 가치가 떨어지니까 값이 오르기 전에 먼저 계산하고 느긋이 환담을 나누라는 농담이었다.

▲ 남영진 논설고문

이런 현상이 이제는 남미의 북부 베네수엘라에서 벌어지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베네수엘라의 내년 인플레이션을 2,300%까지 전망했다.

남미에서 쿠바와 함께 반미 정책으로 유명한 우고 차베스 대통령에 이어 집권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의 강권통치와 국제 석유가 인하로 베네수엘라는 국가부도위기에 몰리고 있다. 세계적인 신용평가사 피치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이달 초 베네수엘라의 국가신용등급을 'CC'에서 'C'로 낮추었다. 두 단계만 더 떨어지면 디폴트(채무불이행) 등급이 된다. 뉴욕타임스는 베네수엘라의 해외부채가 1,400억 달러에 달해 국가부도가 불가피한 것으로 보도했다.

블룸버그통신은 마두로 대통령이 국영 석유회사 PDVSA의 부채 11억 달러(약 1조2270억원)의 원금상환 후 채무이행중단 등 채무 재조정에 나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베네수엘라 정부와 PDVSA, 이 나라 국영 전력회사 등은 이미 8억 달러 규모의 이자를 연체한 상태다. 미국은 지난 8월 마두로 대통령이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헌의회’를 구성하자 베네수엘라에 금융제재를 가해왔다.

남미의 입구인 콜롬비아와 함께 대서양에 면한 베네수엘라는 우리에게는 반미 정책으로 유명했던 차베스 전 대통령과 미스 유니버스에 많이 당선된 미인의 나라, 그리고 지난해 의회를 해산하고 ‘제헌의회’를 구성해 국민들의 저항을 받았던 마두라 대통령, 석유가 풍부한 나라로 기억된다. 지중해의 이탈리아 베네치아 못지않게 해안선이 아름다워 '작은 베네치아'라는 베네수엘라(VENEZUELLA)로 불린다.

▲ 지난 8월 12일(현지시간)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퇴임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대가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카라카스=AP/뉴시스 자료사진]

스페인이 16세기 이후 중남미를 식민지로 삼아 300여 년간 통치하다 19세기 초 남미의 '해방자'로 불린 시몬 볼리바르 장군에 의해 콜롬비아, 에콰도르와 함께 '그란 콜롬비아 연방공화국'이 되었다가 베네수엘라라는 이름으로 독립했다. 그 후 독재자들의 통치가 계속되었는데, 1908년 미국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던 후안 비센테 고메스 대통령도 그 중 하나였다.

마두로 대통령은 최근 10만 볼리바르(화폐단위) 고액권을 발행했다. 지난해까지 최고액권이던 100볼리바르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때문에 실질가치가 0.07달러 수준까지 떨어지자 올해초 200배의 2만 볼리바르권을 새로 발행한 뒤 10개월 만에 다시 그 5배가 되는 10만 볼리바르 권을 내놓은 것이다. 그러나 100배가 오른 고액권도 인플레를 이기지 못하고 실질가치는 더 떨어졌다. 10만 볼리바르는 공식 환율로는 1만 달러이지만 암시장에서는 2.4달러(약 2800원)에 거래되고 있다.

세계에서 다섯 번째 산유국인 베네수엘라에서 석유는 경제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1918년 마라카이보 호(湖)에서 처음으로 석유가 생산되면서 급속도로 개발돼 1928년 무렵에는 이미 세계 2위의 석유 생산국이자 세계 1위의 석유 수출국이 됐다. 소규모의 가난한 도시였던 마라카이보 시는 인구가 급증하여 대도시가 되었고, 수도 카라카스는 영국과 미국의 석유회사 본부나 은행이 들어와 일약 국제적인 도시로 발돋움 했다.

▲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혁명가 시몬 볼리바르의 초상화가 걸린 집무실에서 올해 초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카라카스=AP/뉴시스 자료사진]

그 후 석유는 마라카이보 호(湖) 이외에 동부의 팔콘 주나 남부의 아푸레 주, 바리나스 주에서도 생산되어, 세계 석유시장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은 점차 증대되었다. 베네수엘라는 사우디 아라비아와 쿠웨이트, 이란 등 중동국에 이어 세계 다섯 번째 산유국이 되어 석유가 전체 수출의 80%를, 재정수입의 42%를 차지하게 됐다.

1958년 이후 베네수엘라의 경제를 번영시켜 '경제 대통령'이라는 명성까지 얻었던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 대통령은 최초로 재선이 됐으나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그는 석유 때문에 국민적 영웅이 됐다가 석유가격 하락으로 반역자가 된 '석유에 살고 석유로 죽었던' 대통령이었다. 그는 1973년 외국의 석유회사들을 축출하고 국유화하면서 국영석유공사(PDVSA)를 설립했다. 철강회사들도 국유화했다.

베네수엘라는 석유 수출로 소득이 늘면서 소비 풍조가 만연해지자 부가가치가 낮은 농업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편의주의와 한탕주의가 만연했다. 정치인은 석유로 얻어진 재원을 빼돌려 자신들의 기득권 보호나 재산을 늘리는 데 몰두했다. 그러나 석유가격이 하락하면서 경제는 수렁에 빠지게 됐고 국민의 저항도 거세졌다. 베네수엘라는 '석유'로 인해 어려움에 봉착한 ‘검은 황금의 저주’를 받고 있다.

▲ 극심한 경제위기와 인플레로 돈가치가 없어진 베네수엘라의 볼리바르 화폐가 지난 7월 20일(현지시간) 카라카스 반정부 시위대의 도로차단용 밧줄로 쓰이고 있다. [카라카스=AP/뉴시스 자료사진]

디폴트 위기속에서도 마두로 대통령의 선심정책은 여전하다. 성탄절 이전 최저임금과 퇴직연금은 각 30% 인상하고 저소득 400만 가구에 50만 볼리바르의 보너스를 지급하고 어린이에게 인형을, 전 가구에 돼지어깨살 6㎏을 지급하겠다고 한다. 외환 채무불이행과 살인적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화폐이름으로 쓰이는 독립영웅 ‘볼리바르’의 명예도 함께 추락하는 거 같아 안타깝다.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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