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진의 청호칼럼

[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미시령을 처음 넘는단다. 1987년 미국으로 건너갔으니 미시령을 몰랐던 게 당연하다. 대학 78학번이니 그때는 내설악산과 속초, 화진포 등을 가려면 진부령을 이용했다. 동해안과 외설악은 오색, 한계령 넘어 양양과 설악동을 거쳐 비선대, 양폭, 천불동 계곡을 지나 대청봉에 올랐다.

▲ 남영진 논설고문

당시만 해도 미시령은 군사도로로 일반인들은 갈 수 없었다. 그는 10월의 마지막 주 미시령터널을 나와 오른쪽에 높이 솟은 울산바위와 단풍 숲을 보며 감탄했다.

“이 정도 경치면 규모는 작지만 미국 그랜드 캐니언이나 자이언 캐니언 못지않네요.” 목소리가 잠겼다. 그도 대학 때 친구들과 청량리에서 늦은 밤차를 타고 새벽에 정동진 근처의 벌건 일출을 맞으며 강릉역 종점에서 내린 기억을 한다.

외설악 코스를 타고 대청봉에 올랐다 내려와 낙산사를 보고 낙산해수욕장에 텐트를 치고 3박 4일의 설악산 등정을 했단다. 물론 올 때도 강릉에서 유행하던 고래사냥 가사처럼 ‘3등3등 완행열차’를 타고 청량리로 돌아온 적이 있다.

그에게는 30년 만에 가는 동해안 여행이다. 집사람이 운전해 셋이서 그가 미국 가기 전 가본 백담사를 먼저 들렀다. 서울-양양 고속도로가 2시간 행이었으나 집사람이 고속도로는 터널이 많아 볼게 없다 해서 동홍천IC로 나와 국도를 탔다.

진부령과 미시령이 갈리는 용바위식당에서 황태구이로 점심을 먹었다. 용대리로 되돌아와 주차장에 차를 두고 버스로 백담계곡을 올랐다. 고즈넉했던 백담사가 만해 한용운기념관과 템플스테이 하는 요사채가 많이 들어서 몰라보게 변했다고 그가 말했다.

오후 일정은 백담사를 보고 설악동을 거쳐 비선대까지 갈 생각이었으나 경치를 보고 일정을 바꾸었다. 대청봉을 오르기 전 바로밑 봉정암까지는 왕복 6시간이라 힘들고 3,4㎞거리인 영시암(永矢庵)까지만 다녀오기로 했다. 평일이라 잘한 선택이었다.

나도 두세번 백담사 근처엔 와봤지만 본격적인 설악산 가을 단풍여행은 처음이다. 10년 전 주말에 산악모임에서 관광버스를 빌려 1박 2일 콘도에 왔다가 자정이 넘어 콘도에 도착해 이튿날 일찍 조반 먹고 한계령 거쳐 귀경길에 길이 막혀 밤늦게 돌아온 기억이 지겹다.

▲ 화창한 가을날씨를 보인 지난 21일 강원 인제 백담사를 찾은 관광객들이 울긋불긋 물든 단풍을 감상하며 가을 정취를 만끽하고 있다./뉴시스

이번에는 평일이라 인파도 적당했다. 무엇보다 가파르지 않은 영시암까지의 계곡산행이 좋았고 단풍이 한창 절정이었다. 홍단풍 청단풍은 빨간, 노란물이 들었고 갈색으로 변한 자작나무, 서어나무 등 활엽수 단풍잎이 떠다니는 4㎞ 남짓의 백담계곡물은 세계 어디서도 보기 힘들 것이다.

화강암 바위사이를 흘러 물이 깨끗하고 바위사이로 폭포지어 내린 곳곳에 소(沼)와 연(淵)을 만들고 굽이도는 평지엔 넓은 담(潭)을 이루었다. ‘백담’(100개의 못)이 중국인들처럼 과장이 아니다.

백담사에서 미시령 터널을 넘어 물치항에서 생선회와 매운탕과 소주 ‘처음처럼’을 곁들여 저녁을 먹었다. 그는 대학시절 이곳서 마시던 ‘경월’을 찾았으나 이젠 ‘처음처럼’으로 바뀌었다. 태풍 ‘란’이 일본으로 관통했지만 동해안은 방파제를 넘실댈 정도로 강풍이 심해 어선이 출항 못해 회센터의 수족관엔 양식 어종인 참도미, 광어, 방어 등만 있었다. 미국서도 가끔 친구들과 한인타운의 한국식당에서 회를 먹기도 하지만 역시 바닷가라 맛이 다르단다.

고교 4년 후배 김상기(59). 대학 국문과 시절 연극에 재미를 느껴 희곡 극본도 긁적거리고 연출도 배우다 군대를 마치고 여러 곳에 기웃거렸으나 심한 경쟁 사회에 적응이 힘들었다. 내성적이라 막무가내 한국사회선 뒤처지기 쉬운 타입이다. 내가 한국일보 기자 시절 우리 집 네 식구와 6개월간 함께 살던 그는 미국에 가고 싶어 했다. 일단 사이판에 건너가 기념품 가게에서 일하다 근처 팔라우섬에서 비자를 얻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 지난 9일 설악산 대청봉에서 바라본 신선대와, 권금성, 달마봉, 만경대, 울산바위 등 풍경이 잘 그려진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케 한다./뉴시스 자료사진

로스앤젤레스에서 처음엔 옷감류 수출입 업무에 종사하다 유학 온 한국 여자와 결혼해 딸을 낳고 어렵다는 미국 부동산업에 발을 내딛었다. 어느 정도 영어가 되자 유대인이 경영하는 LA근교 글렌데일의 부동산 소개업소의 에이전트로 취직했다. 죽으라고 공부해 소개업 라이선스를 따고 영주권, 시민권까지 얻었다.

부부가 맞벌이했으니 딸을 학비가 비싼 남가주대학(USC)에 보낼 수 있었고 80세가 넘은 유대인 보스가 은퇴하면서 가게를 넘겨주어 지금은 3,4명의 직원을 거느린 부동산 가게의 대표로 일한다.

30년 만에 작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것이다. 이번이 세번째 귀국이다. 유대인 보스 밑에서 일에 바빠 한국에 오고 싶어도 어려웠다. 어머님 돌아가셨을 때, 미국에서 태어난 딸에게 한국을 보여주고 싶어 대학에 들어갔을 때, 그리고 이번에는 병원에서 종합검진을 받기위해 왔다. 미국에서 한 달에 1,000달러 이상의 의료보험료를 내지만 종합검진은 너무 비싸 엄두도 내기 힘들단다. 다행히 걱정했던 위장과 대장내시경 검사엔 아무것도 없이 깨끗하다고 해서 기분이 좋다.

이번엔 10일 일정으로 여유가 있어 30여년 만에 5일간 우리집에서 잤다. 종합검진도 하고 누나집과 처가집에서도 자고 친구들과 시내서 술도 한잔하고 후배 만나러 2박으로 일본 도쿄(東京)도 다녀왔다. 우리와는 하남 마방에서 한정식도 먹고 팔당을 거쳐 마재의 다산기념관을 봤고, 백담사 들러 솔비치콘도에서 자고 강릉 오죽헌과 카페촌의 테라로사(TERA ROSA)에서 맛있는 커피와 빵도 먹었다.

미국에 사는 한인들은 매일 한국 관련 뉴스를 보지만 떠날 때의 한국 풍경만 추억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군사정권의 암울했던 70~80년대를 겪었던 그도 이렇게 가끔 오는 건 좋지만 귀국해서 살 생각은 없다고 말한다.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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