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영의 길과 사람 사이

[이코노뉴스=김미영 칼럼니스트]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도드라지는 장면 하나는 김남길이 이런 길 혼자 다니면 위험하다며 설현을 태워주는 것이다. 다 큰 여자가 너무 쉽게 남의 차를 타는구나 쟤 죽겠구나 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왜 그리 스스럼없이 모르는 남자의 차를 탔을까?

▲ 김미영 칼럼니스트

그 장면에 있던 제3의 인물(?) 생명체(?)가 사태를 설명해준다. 아주 귀엽게 생긴 강아지를 김남길이 안고 있었던 것. 강아지를 안고 있는 남자란 아기를 안고 있는 남자와 거의 동급의 포스로 상대 여자를 무장해제 시킨다.

단독주택으로 이사한 지 삼년차가 되어가며 조금씩 수리할 곳이 생긴다. 하수도가 새서 동네 수리 아저씨를 불렀더니 그 분, 집에 들어서며 버럭 야단친다. 아니 왜 마당 있는 집에서 개를 안 키워요? 그건 이런 단독 주택에서 개를 안 키우면 도둑이 들지 않겠느냐는 걱정의 말이 아니었다.

마당이 있어서 얼마든지 개를 키울 수 있는데 도대체 왜 개를 안 키우냐 당신 성격 이상한 사람이냐 뭐 그런 뉘앙스였다. 하도 거침없이 무례해서 실소만 날렸는데 그 무례함이 조금 덜했다면 난 기를 쓰고 설명했을 것이다. 지가유 실은 개를 엄청 좋아하는데유, 알러지가 있고유 한 편 우리 아들은 유 어쩌고 저쩌고 하며.

나의 시누들은 개를 무척 싫어하고 겁내한다. 저어기 개가 보이면 멀리 돌아갈 정도. 어릴 때 집에서 큰 개를 키우기도 했다는데, 모두들 개를 무서워해서 시아버님이 늦게 귀가하시는 날엔 긴 막대기로 연결해서 멀리서 밥그릇을 밀어줬단다. 포유류에겐 스킨십이 중요하다는데, 그 개 참 사랑받지 못했구나 불쌍하구나 했다, 속으로.

우린 그저 처음부터 개가 무섭고 그래서 좋아할 수 없었는데, 개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면 이상한 사람 몰인정한 사람 취급들 한다고 시누들은 덧붙였다. 어머머 난 개 좋은데 예뻐서 물고 빨고 하는데, 어쩌고 하는 내 말에 깃든 약간의 윤리적 우월감을 읽었나 싶어 찔끔 했다.

애완견이 아니라 반려견을 키우는(?) 동거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꽤 먹고 들어가는 분위기 아닌가. 뭔가 생명을 존중하는, 뭔가 살아 있는 무기력한 것을 애뜻하게 품어주는, 뭔가 평화롭고, 뭔가 채식주의자의…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에 대한 사랑과 연대감의 지속적 상승 추세 속에서 말이지.

▲ 반려동물협회 회원들이 23일 서울 영등포구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에서 반려동물 전문법안 입법 촉구 집회를 열고 있다. 이들은 현행 축산법에서 3kg 미만 소형 반려동물이 소·돼지와 같은 환경과 시설로 규제받고 있다며, 소형 반려동물에 적합한 전문법안 재정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뉴시스

근래의 동물 ‘반려’ 현상은 사회학적으로도 쉽게 설명된다. 일단 1인가구 증가와 동물을 ‘반려’하는 것의 증가가 나란히 간다는 것은 누구 눈에도 보일 것. 외롭게 부유하는 자기 삶에 뭔가 든든한 체온과 물성(육체성)으로 뿌리를 내려 주는 존재를 곁에 두기.

2인 이상 가구, 가족 간에 맨숭맨숭 텔레비전이나 보다 잤는데 하나의 생명체가 활발하게 꼬물거리니 공통의 관심사와 화제 거리가 생겨 가족 간에 아연 훈기가 돈다. 보살핌 받기만 하는 어린이가 보살필 대상을 가지며 애정의 리허설을 해 보기도 한다.

집구석이라고 들어와 봤자 누구 하나 살갑게 맞아 주지 않는데 개는 꽁지가 빠져라 흔들어대며 매번 대환영이니 위기의 중년남자, 반려견에게 애뜻할 수 밖에. 우리가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해져 각종 취미, 취향을 추구할 수 있다는 조건도 깔려 있겠다.

즉 동물을 ‘반려’ 할 여유가 생겼고 이유가 여럿 생겼으며 그래서 반려인구도 많아진다는 이야기. 개인의 무해한 취미? 혹은 사생활이랄 수 있는 것이 이제 사회적으로 중대한 사건을 일으킬 수도 있게 되었으니 그것을 둘러싼 윤리적 코드를 마련할 때이다.

▲ 그래픽/뉴시스

반려동물과 함께 산다는 것 자체가 윤리성을 담보하지 않는다. 개를 원래부터 무서워하고 싫어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 동물을 사랑하는 것이 의문의 여지없이 윤리적이라고 믿는다면 히틀러를 한 번 떠올려 보라.

하나의 생명을 책임지는 것은 막중한 일이다. 지 새끼 이쁘면 똥도 ‘황금똥’이다. 이쁜 짓 할 때만 이쁘고 똥은 치우기 싫다면 그건 좀 가짜. 그 짐승이 원초적 본능을 발휘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미리 방비하는 것도 애정의 대상에 대한 구체적 관심이다.

어린 동물의 예쁜 모습을 탐하다가 늙고 병 들면 버리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일종의 지위재를 소비한 것에 불과하다. 이 익명의 시대에 자기가 방귀깨나 끼고 산다는 것을 불특정 다수에게 알리는 시그널을 쏘는 게 지위재(goods of position)이다.

▲ 가수 이효리가 반려견 순심이를 안은 채 활짝 웃고 있다./뉴시스 자료사진

참 좋아 보인 ‘반려’ 모습은 이효리가 유기견 데려다 키우는 것, 그리고 김완선이 불구의 고양이 기저귀 채우는 모습이다. 기왕에 태어나 고초를 겪는 생명체를 거두어 키우는 일은 훌륭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훌륭할 수도 없고 훌륭해지려고 사는 것도 아니다.

그저 어떤 이유로든 동물과 동거한다면 자기 집 안이 아닌 곳에서는 줄로 묶고 입마개 하고 인식표 붙이고 똥 치우는 정도의 공중도덕을 지키는 것이 동료 호모 사피엔스에 대한 최소윤리 아닐지. 법적인 규정도 뒤따라야겠지만.

※ 김미영 칼럼리스트는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고대, 홍대 등에서 강사로 일했고 학술연구교수를 역임했다.

전공은 현대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로 관련 책과 논문을 여럿 발표했으며 섹슈얼리티 문제도 연구했다. 광우병 사태 즈음에 한겨레신문에 컬럼을 연재한 경험이 있다. 지금은 강사를 그만 두고 다양하게 읽고 다니고 보는 생활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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