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범의 경제산책

[이코노뉴스=최성범 주필] 방송 프로그램인 장학퀴즈는 1973년 2월부터 MBC(문화방송)에서 방영되기 시작해 1996년 이후 EBS(교육방송)에서 방영되고 있는 장수 프로그램이다.

▲ 최성범 주필

차인태 전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인기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장학퀴즈는 시작 때부터 SK그룹이 후원한 프로그램이다. 기업들이 방송 프로그램을 협찬하는 경우는 많지만 이처럼 회사 이익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프로그램을 거의 반세기 가까이 말없이 후원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한국고등교육재단이라는 장학재단이 있다. 인재들을 세계적인 학자로 육성하기 위해 유학비용 등 학자금을 지원함으로써 학문 및 국가발전을 목적으로 하는 비영리공익법인이다. 지금까지 해외유학지원 등을 통해 550명의 박사학위자를 배출했다.

명칭만으로 누가 돈을 대는지 알기도 어렵고 마치 국가 기관 같기도 하지만 1974년도에 SK(당시엔 선경) 그룹의 고(故) 최종현 회장이 설립한 장학재단이다. 홍보도 별로 하지 않아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외국 유학을 다녀 온 학자들 사이에선 지원 조건이 좋기로 유명한 장학재단이다. 최근에는 국제학술사업 지원에도 나서고 있다.

1970년대 중반 당시만 해도 SK는 유공(현 SK이노베이션)도 SKT(SK텔레콤)도 없는 섬유업 중심의 중견기업에 불과했지만 당시 재계 1, 2위의 재벌도 시도하기 쉽지 않았던 과감한 후원을 통해 장학사업을 추진했다.

장학사업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고 최종현 회장이 미국 유학 생활 중에 부친의 사망으로 귀국하면서 학자로의 꿈을 접어야 했던 개인적인 경험과 무관치 않다고 한다. 학문 연마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회사 규모를 뛰어 넘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고 최종현 회장의 이러한 ‘공부 사랑’과 사회공헌에 대한 남다른 관심은 섬유업 중심의 중견기업이던 SK그룹이 도약하는 데 있어서 큰 힘이 됐다. 고 최 회장의 학자풍인 기업 경영 철학은 인재를 끌어 모으는 유인이 됐을 뿐만 아니라 합리성을 기반으로 한 그룹 경영의 토대가 됐다.

특히 장학퀴즈 등을 통해 얻게 된 착한 기업 이미지는 이후 유공과 한국이동통신(현 SKT) 인수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원군이 되었다. 이처럼 사회와의 공존을 중시하는 기업문화는 덩치가 훨씬 큰 기업을 인수한 뒤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따로 또 같이’로 상징되는 SK 특유의 공존의 문화다.

올해로 그룹 회장에 취임한 지 20년째인 최태원 SK 회장이 2017년 10월 자신의 브랜드를 단 공존 프로그램을 내보였다. 지난 18일부터 20일까지 SK그룹 'CEO(최고경영자) 세미나'에서 최 회장은 사회적 가치 창출은 SK의 존재이유라며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선 사회 문제 해결 등과 같은 사회적 가치 창출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도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야 존재할 수 있는 시대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며 "사회적 가치가 포함된 경제적 가치는 기업이 생존하기 위한 선택 요건이 아니라 필수 요건"이라고 말했다. 보통의 사장단 세미나가 변화와 혁신, 글로벌화 등을 얘기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지난해 주제가 딥체인지(Deep Change·근본적 변화)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큰 변화다.

최태원표 장학퀴즈, 공유가치창출(CSV)은 가장 적극적인 기업의 사회적책임

SK그룹이 내세운 공유가치창출(CSV·Creating Shared Value)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가운데에서 가장 적극적인 개념이다. 기업의 사회적책임이 경제적 책임, 법적 책임이 좁은 형태의 소극적인 개념이라면 SK의 CSV는 법적 책임과 윤리적 책임을 뛰어 넘어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업이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 SK그룹이 내세운 공유가치창출(CSV)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가운데에서 가장 적극적인 개념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 6월 '2017 사회적기업 국제포럼'에서 사회적기업 10만개 육성 등 기업의 사회적책임을 강조하고 있는 모습. (사진=SK그룹 제공)

기존의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에 비해 몇 단계 더 나간 개념이다. 기업이 사회와 공존해야 하는 만큼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소극적 자세를 버리고 자신의 문제처럼 인식하겠다는 자세다. 공존과 화합을 중시하는 SK의 기업문화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2017년 최태원판 브랜드는 한마디로 사회와의 공존이다. 이는 '함께하는 성장, 뉴 SK로 가는 길'이라는 이번 세미나의 주제가 그대로 말해준다. CSV가 2017년 최태원표 장학퀴즈인 셈이다.

이를 위해 SK그룹은 '사회적 가치 창출'과 '기업의 성장·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키워드로 '공유 인프라 활용'을 제시했다. 예를 들어 전국 각지에 있는 SK주유소를 공유 인프라로 활용해 정비 기능을 더하고 빅데이터까지 연결하며, SK 각 계열사의 교육 시스템을 연구소와 통합해 협력업체로 개방한다든지, 계열사별 콜센터 인프라를 AI(인공지능)와 결합하는 것도 공유 인프라의 활용 사례 중의 하나다. 수펙스추구협의회 내에 '공유 인프라 TF(태스크포스팀)'를 두고 약 60여개의 프로젝트를 검토 중이라고 한다.

SK의 이번 선언은 문재인 정부와의 접점을 찾으려고 하고 있는 다른 대기업들에게도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SK그룹의 이러한 시도가 나눔을 중시하는 현 문재인 정부의 정책기조에 호응하려는 목적도 담겨있다는 점을 부인키 어렵다.

그러나 단순한 면피 차원을 뛰어 넘어서 사회문제가 기업들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자세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겠다고 나서는 등 진정성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뭔가 다르게 다가오는 게 사실이다.

대기업들의 영향력과 사회적 위상이 높아져 사회적 책임에 대한 기대수준도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이같은 상황에서 SK그룹을 비롯한 기업들의 적극적인 사회적 책임 활동은 한국경제의 앞날을 위해서나 한국 사회의 건강성을 위해서나 바람직한 모습이다.

 

※ 최성범 주필은 서울경제 금융부장과 법률방송 부사장, 신한금융지주 홍보팀장, 우석대 신문방송학과 조교수를 지내는 등 언론계 및 학계, 산업 현장에서 실무 능력과 이론을 쌓은 경제전문가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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