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올레길’은 전 세계로 수출되는 ‘한류’의 한 품목이 됐다.

▲ 남영진 논설고문

10년 전 제주에서 출발한 올레길은 남한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제 지방에는 옛날 나무꾼이 지게지고 나무하러 다니던 산길, 보부상이 봇짐지고 다니던 고갯길, 일제 때 트럭이 통나무를 베어내어 옮기던 길인 임도에서부터 동네의 골목으로 연결되고 있다.

전국에 ‘둘레길’이라는 이름의 트래킹코스가 없는 곳이 없다. 관광과 건강을 한꺼번에 즐기는 ‘일타이매’의 황금길이다.

올해가 제주도 올레길이 탄생한 10주년이다. 제주 출신의 시사저널 편집국장을 지낸 서명숙씨 등이 귀향해 기획한 길이다. 박정희 정권 초기에 전국의 깡패를 데려다 강제 노역시켜 만든 한라산의 남북을 종단하는 ‘5,16도로’가 첫 포장도로였다. 이후 중문단지가 생기면서 제주에서 중문과 서귀포를 연결하는 서쪽의 남북종단 도로 외에도 많은 포장도로가 생겼지만 한라산을 보면서 느긋이 걸을 수 있는 길은 별로 없었다.

지난 주 재경 향우회원들과 3년간 벼르던 한라산 등산을 하러 제주도에 다녀왔다. 원래 백두산을 가려고 매달 조금씩 돈을 모았으나 지난해부터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THAAD) 배치 문제로 한·중 관계가 악화돼 일본의 후지산(富士山)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런데 후지산도 60대 이상은 고산병을 겪는다 해서 결국 해외(?)인 제주도 한라산으로 방향을 튼 거였다. 32명의 남녀혼성 산악회원들은 “초등학교 수학여행 후 처음 고향 사람들과 같이 3박4일 여행간다”며 들떠 있었다.

▲ ‘2015 제주올레걷기축제' 참가자들이 김녕해수욕장에서 제주해녀박물관을 잇는 올레길을 걷고 있다./뉴시스 자료사진

문제는 태풍 ‘탈림’의 행보였다. 가던 날 일본 오키나와(沖繩) 남쪽 해상에서 북상하던 태풍의 진로가 이번에는 제주를 거쳐 한반도로 올라올 가능성이 큰 것으로 예상됐다. 하룻밤 자고나니 하늘은 흐리지만 태풍이 천천히 일본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해서 안심했다.

대장이 카톡을 보더니 한라산이 강풍 때문에 입산금지란다. 할 수 없이 오름을 잇는 한라산중턱의 ‘둘레길’ 15km를 걷기로 했다. 한라산 백록담은 이번에도 나에게 민낯 보이기를 거부했다.

신혼여행부터 관광과 호텔세미나 등의 기회로 제주를 많이 가봤어도 한라산 정상은 오르지 못했다. 바쁜 시간을 내어 차로 영실과 성판악까지 가서 조금 오르다 포기한 적은 있다. ‘돌하루방’ ‘혼저 옵서예’ ‘놀멍 쉬멍’ 등 외국어 같은 제주말을 재미로 들어보기는 했어도 ‘올레’라는 단어는 처음 들어봤다. 제주도민들끼리 말을 하면 거의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단어보다는 억양이 특이하다.

많은 제주도민들은 뭍사람들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을 갖고 있다. 1948년 4.3사건 이후 한국동란을 겪으면서 좌우 대립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서로 말을 삼갔다 한다.

육지에서 온 군경들이 4.3사건 때 중산간 마을까지 불태우고 오름이나 한라산 중턱의 동굴로 도망간 좌익 빨치산과 이를 도왔던 마을 친척들까지 마구 살해해 수만명이 죽었다. 이후 제주의 길은 소통보다는 두려움과 피난의 길이었다. 제주 일주도로가 완성된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 숨어있던 작은 길들을 찾아내 마을 고샅길을 뜻하는 제주말 ‘올레’로 살려냈다.

▲ 지난해 11월 7일 해군이 창설 71주년을 기념해 일부 개방한 제주해군기지에서 아이들이 단체관람을 하고 있다./뉴시스 자료사진

제주인들은 역사적으로 삼국시대 왜구의 침탈, 몽골의 100년 지배, 일제의 수탈과 군기지화 그리고 해방 후 4.3사건까지 외부인에게 무수히 수탈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최근 10여년 전부터는 중국인이 북쪽 제주국제공항을 통해 입도해 관광과 부동산 투자를 하고 식당까지 직접 경영한다. 이어 남쪽 서귀포와 중문 사이에 구럼비바위(둥근 바위)밭을 부수고 강정(江汀)해군기지까지 들어서 또 한 번 ‘외세침입’의 몸살을 앓고 있다.

제주를 가장 오래 점령한 외부인은 원나라 시대의 몽골족이다. 제주는 탐라국으로 시작했지만 한성 백제 때부터 지방 관직인 담로가 파견돼 있었다니 5세기 이후부터는 백제의 영토였다.

부산에서 눈에 보이는 쓰시마섬(對馬島)은 여말과 조선 초 2번씩이나 정벌하고도 영토로 편입시키지 않았지만 대마도보다도 3배나 먼 제주도를 경략한 것은 우리나라로서는 행운인 셈이다. 이후 13세기말 몽골의 7번 고려 침략 후 원나라의 사위국이 되면서 제주도에 몽골족이 타고 다닐 말목장을 만들었다.

무신정권의 최씨 집안이 강화도에서 항복해 임금을 모시고 개경으로 돌아왔다. 항복을 반대한 김통정 장군의 삼별초군이 진도를 거쳐 제주도까지 남하해 제주시 서쪽 해변에 항파두리성을 쌓고 끝까지 싸우다가 전멸했다.

▲ 최영 장군 영정/경기도제2청=뉴시스 제공

지금도 석성이 남아있는 항몽(抗夢)유적지다. 해전에 약한 몽골군은 고려군을 앞세워 1273년(원종 14년) 2년 만에 삼별초군을 평정했다. 원나라는 탐라총관부를 설치해 약 101년간 제주도를 지배했다.

역사는 돌고 돌아 최영(崔瑩)장군이 1374년(공민왕 23년) 제주를 지배해오던 몽골군을 정벌했다. 항복을 거부하며 묵호가 지휘하던 몽골인들이 쫓겨 들어간 서귀포와 강정사이의 ‘범섬’을 진압하면서 원나라로부터 영토권을 회복했다. 이를 역사에서는 ‘묵호의 난’이라고 부른다. 원나라는 제주도 서쪽 산림의 거목들을 베어내 일본침략용 배를 건조하고 여기에 목초지를 조성해 말목장을 만들었다.

제주와 경남 마산에서 출발한 두 차례의 여·몽 연합군이 일본 규슈(九州)의 하카다(博多)항에 들어가 왜군을 격파했다. 승리의 기쁨에 취해 연안의 선단에서 잠자던 연합군은 태풍이 몰아쳐 거친 파도에 거의 몰살하는 참변을 겪고 결국 일본 점령은 실패한다.

일본에서는 이때의 태풍을 신이 도와준 것이라며 ‘가미카제’(神風)라고 부른다. 태평양전쟁 말기 패색이 짙어가던 일본 군부가 젊은 비행사를 전투기에 태워 미국 군함의 굴뚝으로 돌진하게 만든 ‘가미카제특공대’가 여기서 나왔다.

이 범섬을 가까이 보면서 도는 해안 길이 올레길 7코스다. 강정면에서 범섬을 끼고 걷다가 신혼여행 때 꼭 들르던 외돌개를 거쳐 서귀포까지의 올레길이다.

지금은 최영장군승전기념비가 높이 솟아 있다. 북한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일본 홋카이도(北海道)를 넘어 북태평양으로 또 발사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800여년 전 원나라의 지배와 최영 장군의 토벌, 미국의 군함도 드나들 수 있는 강정해군기지와 중국의 사드배치 반발 등 한반도를 둘러싼 외세의 먹구름이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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