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시민들이 이겼다.”

오랜만에 들어본 소리다. 이명박, 박근혜정부의 지난 9년 동안은 미국 쇠고기수입, 4대강 정비, 자원외교,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댓글수사, 세월호 수사, 원전 건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등에 대한 반대시위나 호소가 통한 적이 없었다.

▲ 남영진 논설고문

정부의 일방적인 밀어붙이기에 국민들은 말없이 따라가거나 저항하다 다친 경우는 있었지만. 따라서 이번 결정은 시민들의 목소리를 정부나 공기업이 들어준 거의 첫 케이스다.

지난 8월말 서울 용산 화상경마장 폐쇄 결정에 대한 언론의 제목들은 거의 ‘주민승리’였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피부로 느끼는 변화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 8월 27일 용산구 화상경마장 추방농성장 앞(서울 용산구 청파로 52)에서 열린 협약식에 참석해 화상경마장으로부터 학습권과 주거권을 지키기 위해 4년 넘게 반대운동을 이어온 주민들을 격려했다. 박 시장도 용산화상경마장의 운영 반대 입장으로 마사회를 압박해 왔지만 진정한 승리자는 인근 주민들이다.

협약식에는 화상경마도박장추방대책위원회(대책위),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 농림축산식품부 등이 참석해 올해 말까지 용산 화상경마장을 폐쇄·이전하기로 합의했다.

박 시장은 축사에서 "주민 여러분들이, 우리 모두가 승리했다"며 "다시는 지역주민이 경마장 등 사행산업으로 고통 받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다짐에서 이 장소에 기념비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이양호 마사회 회장이 “갈등과 분열을 해소하고 소통과 화합 차원에서 대승적 결단을 내리게 됐다”고 밝힐 정도여서 ‘복마전’ 마사회가 변하고 있음을 실감케 했다.

▲ 지난달 27일 서울 용산구 화상경마도박장 추방농성장 앞에서 열린 화상경마장 폐쇄를 위한 협약식에서 참석자들이 '우리가 승리했다', '경마도박장 아웃'이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뉴시스 자료사진

마사회는 4년 이상 “법적으로 문제없다”며 화상경마장을 강행해오다 이전도 아닌 ‘폐쇄’ 결정을 한 것과 관련, “공론과 합의에 의한 정책을 결정하려는 새 정부의 정책 방향에 적극 부응하기 위한 것이며 사회적 요구에 따른 마사회의 혁신의지”라고 솔직히 밝히고 있다.

마사회가 어떤 곳인가? 공공기관 중에 ‘복마전’ 소리를 듣는 곳은 정부 부처로는 국방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서울특별시, 그리고 공기업 중에는 아직도 원전폐쇄 문제로 말썽을 빚고 있는 한국전력과 한국수력원자력, 마지막으로 마사회다.

마사회는 오래전부터 청와대와 여당의 비자금을 대오는 곳이라는 의심을 받을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LET'S RUN'이라는 요령부득의 영어이름으로 바꾸었다.

◇ ‘도박게임의 하우스’ 깔아주는 정부

문제는 성심여중·고교 교사와 학부모들이 제기했다. 이들은 한국마사회가 용산역에 있던 화상경마장을 청파로 52의 새 건물(지상18층, 지하7층)로 이전하기로 결정한 2013년부터 대책위를 구성해 2014년 1월부터 1314일째 노숙농성을 벌였다.

마사회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개장을 강행했다. 법에서 정한 교육환경 보호구역(200m)에서 성심여중·고까지 235m 떨어져 있어 ‘합법’이라는 것이다.

한국마사회는 생활권과 교육권이 침해된다는 학교와 학부형,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014년 6~10월 경마장을 시범운영한 뒤 2015년 5월 정식 개장했지만 8월 24일 청와대에서 열린 관계자 간담회에서 폐쇄·이전에 합의했다.

▲ 지난 2015년 5월 31일 서울 용산 화상경마장(마권 장외발매소) 앞에서 용산화상경마장 개장 반대 주민대책위 회원들이 '화상경마장 개장반대 집회'를 하고 있다./뉴시스 자료사진

문제는 이곳 용산지역만이 아니다. 국민들은 잘 모르지만 화상경마장이 전국에 30개나 된다. 과천 경마공원에서 경마가 진행될 때 전국 각지에서 마권을 사서 실시간 모니터 중계를 보며 순위에 일희일비 하고 있다.

2004년 한국감사협회장을 지낼 때 마사회 감사의 안내로 제주도 말목장을 돌아보며 한 마리에 수억원에 달하는 말산업의 산업적 측면을 들은 바 있다.

‘신이 만든 최고의 동물’이라는 경주마는 수입 가격이 수십억원에 달해 마주들의 투자가치도 크다. 문제는 공기업인 마사회가 산업적 측면보다 곳곳에 사행산업인 화상경마장을 만들어 전체수익의 69%의 수익을 얻고 있다는 점이다.

하기야 탄광촌 주민들을 위한다고 태백에 ‘강원랜드’라는 내국인 전용 카지노를 만들고 서울 삼성동에 ‘세븐럭’이라는 외국인 전용 공기업을 운용하고 있다. 사행산업을 규제하는 게 아니라 정부가 나서서 키우고 있는 셈이다.

서울올림픽의 수익금으로 체육진흥을 위해 만든 체육진흥공단이 올림픽 벨로드롬에 경륜장을 운영하고 미사리 조정경기장에 경정장을 만들어 사행산업을 직접 운영하고 있으니 정부가 ‘도박게임의 하우스’를 깔아주는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장외발매소 정책의 문제점 및 개선방안에 대해서는 많은 세미나에서 문제점이 지적됐다.

장외발매소는 주로 고객 편의를 위해 생활 밀집 지역에 설치된다. 처음에는 재미로 하다가 도박중독이 되는 레저성의 한계, 파산을 막기 위해 베팅 한도를 정해놓지만 이를 지키기가 쉽지 않고 이용객들이 술을 먹고 드나들면서 주변의 학생이나 주민들에게 악영향을 준다는 점들이 지적됐다.

용산의 한 학부형은 “아이들이 다니는 길에 도박장을 보게 할 수는 없었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다. ‘도박 부추기는 사회’에서 어린이의 우정과 꿈을 키우기는 어렵다.

공기업이 사행산업을 운영하는 것은 국민들의 도박심리를 이용해 주머닛돈을 빼앗는 것과 같다. 청소년 비행을 탓하기 전에 어른들이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아진다’는 진리다.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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