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범의 경제산책

[이코노뉴스=최성범 주필] ‘재계는 국민의 반기업 반시장 정서가 심해졌다고 판단, 대응책을 조속히 마련키로 했다.

▲ 최성범 주필

전경련은 반기업 정서의 심각성을 회장단 회의의 주요 의제로 상정해 재계 차원의 공동대책 방안을 중점 논의키로 했다.’ 요즘 신문기사가 아니다. 2003년 5월 1일자 J일보의 기사다.

이러한 현실은 무려 14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반(反)기업 정서를 가진 국민이 절반을 넘었고, 과거 젊은 층을 중심으로 형성되던 반기업 정서가 전 세대에 걸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올해 초 모 언론사의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55.1%가 기업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다고 답해 충격을 주었다. 기업에 호감을 갖고 있다는 답변은 34.1%에 불과했다. 세대별로는 젊을수록 반기업 정서가 높아 30대의 반기업 정서가 70.3%로 가장 높았고, 20대와 40대도 기업에 대한 비호감 비율이 60%를 넘었다. 50대 응답자도 절반이 기업을 나쁘게 인식한다고 답했다. 60대 이상에서만 긍정적 반응이 부정적 인식을 웃돌았다고 한다.

문제는 지난해 탄핵정국을 전후해 형성되기 시작한 반기업 정서가 올 들어 우려할 만한 수준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기업들이 더 이상 일자리를 창출하지 않기 때문에 일자리 문제가 생겼고, 기업들이 더 이상 성장의 주역이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돼던 상황에서 박근혜 탄핵 심판 과정에서 기업들과의 정경유착 사례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기업의 효용성 감퇴와 실망감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재판도 이러한 세상 민심과 결코 무관치 않다. 과거 같으면 기업인으로서 선처를 구하거나 다른 방식의 사회적 공헌이 논의될 만도 하지만 이번에 아예 거론조차 안 된 게 이를 말해준다. 말을 꺼내 봐야 상황만 악화시킬 수도 있다는 판단이 선 탓일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이 반영되긴 했어도 기업인들에 대한 시각이 그만큼 차갑다는 민심을 반영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최근 나오는 정책이나 판결(기아차 상여금) 등을 보면 기업이나 기업인에게 불리한 게 마치 정의로운 것이라는 분위기가 존재하는 듯한 느낌이다.

원래 한국 국민의 반기업 정서는 뿌리가 깊다. 사공농상(士農工商)이라는 전통적인 가치관이 오랜 세월동안 형성되면서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다. 산업화가 진행되고 기업과 기업인들의 역할이 중시되면서 사농공상의 의식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긴 해도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기업들이 성장의 주역이던 시절엔 사회의 눈도 부드러웠으나 기업들의 역할이 설비투자 부진, 일자리창출 미흡 등 국민들의 기대수준에 미치지 못하자 실망감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일부 기업인들의 갑질이 부각되면서 반기업 정서는 다시 수면 위로 올라 왔다고 볼 수 있다.

▲ 최근 들어 반기업 정서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반기업 정서는 근본적으론 기업인들의 잘못이지만 기업가정신을 사라지게 해 한국경제에 부담으로 작용할 우려가 크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진은 올해 초 대구지역 시민단체들이 대구백화점 광장에서 성차별과 상납강요 등 비리의혹이 제기된 주류업체 금복주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이는 모습. /뉴시스 자료사진

특히 땅콩 회항 사건 이후 국민들의 반기업 정서는 수직 낙하하고 말았다. 일반국민으로선 해당 직원에 감정이입이 되면서 그 분노는 극에 달하고 말았다. 그 이후 기업인들의 갑질이나 일탈 행위는 여론의 호된 도마 위에 오르는 게 일상화되었다. 호식이 두마리치킨, 미스터 피자, 종근당 등 기업들의 오너들의 행위는 예외 없이 여론의 호된 질타를 받았거나 사법 처리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게 현실이다. 예전 같으면 그냥 가십으로 끝나고 말았을 지도 모르는 일들이다.

실제로 최근 몇 년 간 미디어에 묘사되는 기업과 기업인들을 보면 부정적인 이미지 일색이다. ‘돈의 맛(2012)’, ‘베테랑(2015)’, ‘내부자들(2015)‘ 등의 인기 몰이 영화와, ’풍문으로 들었소‘와 얼마전 종영된 ’품위있는 그녀‘ 등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부자들은 오로지 돈의 가치만을 숭상하면서 윤리적으로는 눈 뜨고 봐주기 어려운 인간 군상들이다.

영화나 드라마가 아무리 픽션이라고 해도 민심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만큼 세상의 민심이 변했다는 얘기다. 여기에 미디어들이 그런 분위기를 부추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재벌 손자가 관여돼 있다는 이유만으로 한 때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던 숭의초 학교 폭력 사건은 우리 사회의 반재벌 정서가 얼마나 심해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가해자이건 피해자이건 모두 미성년자인 초등생이었음에도 불구, 우리 사회는 이 사건을 마치 스캔들처럼 다루는 게 현실이다.

반기업정서, 한국경제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사회적 비용만 커질 우려

문제는 반기업 정서가 과연 바람직하냐는 것이다. 입장을 바꿔 기업인들이라면 국내외 경쟁여건이 악화되고 있는 가운데 국민들의 눈길마저 차가우면 의욕이 생길까. 물론 상당수의 기업인들은 사회의 변화로서 수용하겠다는 생각을 하겠지만 사업을 접고 현금을 챙겨두는 게 편할 것이라는 생각을 할 가능성이 크다. 아니면 외국으로 주 사업장을 옮기려는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선량한 기업인들의 사기를 꺾어 사업의욕을 감퇴시킬 뿐이다. 이는 그렇지 않아도 기업가정신이 사라져 성장 엔진이 약화된 한국경제에 부담으로 작용할 게 뻔하다. 결국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은 채 사회적 비용만 커진다.

반기업 정서는 근본적으론 기업인들의 잘못이 가장 크다. 경영권 지키기에만 골몰하거나 편법 탈법 행위를 툭하면 저질렀기 때문이다. 기업인들도 자신 만의 성 안에 머물지 말고 세상과 소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 SK 최태원 회장의 ‘따뜻한 자본 주의’ 실험이 눈에 띈다.

그러나 정치권이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를 기업과 기업인들에게 뒤집어 씌우려는 경향도 있다는 점 부인키 어렵다. 정치적 격변기마다 기업들이 도마 위에 오르는 현실은 한국경제의 미래를 위해서 결코 좋을 결과를 낳기 어렵다.

 

 

※ 최성범 주필은 서울경제 금융부장과 법률방송 부사장, 신한금융지주 홍보팀장, 우석대 신문방송학과 조교수를 지내는 등 언론계 및 학계, 산업 현장에서 실무 능력과 이론을 쌓은 경제전문가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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