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의 신간경제 리뷰

[이코노뉴스=김선태 편집위원] ‘조선 침뜸의 으뜸’이라 불린 허임의 삶과 업적이 오랜 망각과 외면의 세월을 넘어 점차 빛을 얻는 중이다.

▲ 김선태 편집위원

그 중심에 서 있는 사단법인 허임기념사업회(대표 손중양)에서 『허임-조선의 침구사』 개정판을 펴냈다.

조선 의료 체계는 약재 처방을 중심으로 하는데, 그 가운데 침뜸을 국가 기본 의료 분과로 독립시킨 이는 세종대왕이다. 세종은 1438년 “매년 침구전문생 3인을 채용하여 삼의사인 내의원, 전의감, 혜민국에 각각 배치시키라”고 하명하였다. 이후 침뜸은 ‘비용이 들지 않고 효과가 좋아’ 꾸준히 명맥을 이어가다 임진왜란으로 대규모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비약적으로 확대되었다.

허준, 허임의 침뜸술을 소개하다

허임의 침뜸술이 초야에 묻히지 않고 살아남은 데는 허준(許浚·1539~1615)의 공이 결정적이라 할 수 있다. 1604년 9월 23일 밤 병색이 완연하던 선조가 편두통 발작을 일으키자 내의원 수의(首醫) 허준이 급히 허임을 비롯한 침의들을 소집했다. 이 때 허준이 왕에게 약재 대신 침 맞기를 청했다.

▲ 『명불허전! 조선의 침구사 허임』 = 손중양 저. 허임기념사업회. 2017. 8. 14.

자신을 지극히 낮추면서 허임의 높은 경지를 설파한 허준의 말을, 당시 사관은 선조실록에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 일부를 보면,

“소신은 침놓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중략) 다만 허임이 평소에 말하기를 ‘경맥을 이끌어낸 뒤에 아시혈에 침을 놓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이 일리가 있는 듯 합니다.”

저자에 따르면 ‘이 말’이 지닌 중요성이 매우 크다.

“허준은 먼저 왕에게 허임의 능력을 신뢰하게 해 주었고 탁월한 이해력을 바탕으로 허임이 터득한 침구술의 요체를 짚어냈는데 이것이 후일 조선 침구학의 핵심 원리가 되었다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조선 의학사상 가장 흥미롭고 의미있는 침구술 강론”이 된 허준의 설명이 틀리지 않아 선조는 며칠 연이어 침을 맞고 쾌차했다. 스타 탄생의 순간이었다. 감격한 선조가 허준에게는 말 1필을 하사하고, 6품의 허임과 7품의 남영을 일거 3품 당상관으로 승진시켰으니, 이는 사관이 “관작의 참람됨이 극에 달한 일”이라 비난할 정도로 대단한 파격이었다.

허준에 따르면 허임은 젊은 나이에 침구학의 원리를 터득했는데, 그렇다면 허임은 누구에게서 어떻게 이를 배웠을까. 저자는 “부친을 따라다니며 보고 들은 바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설명이다.

허임의 부친 허억봉이 일개 면천한 악공 신분에 불과하니 언뜻 연결하기 어려운 대목이지만, 그가 불굴의 노력 끝에 궁중 음악을 관장하는 장악원의 최고 지휘자, 전악(典樂)에 올랐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허임은 어릴 때부터 부친의 소리를 접하면서 “몸을 현으로 생각하는 법(손중양)”을 깨쳤고, 같은 이치에서 조선음악의 기초원리인 ‘12율려’를 인체 내 ‘12경락’에 손쉽게 접목시켰다. 허임이 어린 나이에 침뜸의 원리를 체득하여 당대 최고 의사인 허준을 놀라게 한 데 이런 내력이 있었다.

왕의 부름을 마다하고 귀촌하다

허임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더 나아갔다. 침뜸술의 대가로 우뚝 서 명성을 누리는 일은 허임의 관심사 밖으로 쉽게 밀려났다. 어전에서 인정받은 뒤에도 허임은 자신의 의술을 백성에게 베풀고자 하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이를 위해 궁극적으로 출세의 유혹도 권력의 위협도 무시할 줄 알았다. 평탄치 않았던 허임의 일생이 이를 증명한다.

허임(許任·1570년 경~1647)은 소년 시절부터 유명세를 떨친 침뜸의 신동이자, 동시에 앞길이 꽉 막힌 천출 신분이었다. 그런 이유에서 허임이 청소년기를 제법 오래 방황하며 보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관련, 현재 방영중인 tvN 드라마 ‘명불허전’에 등장하는 청년 허임의 모습이 많은 점을 시사해준다.

▲ tvN 드라마 ‘명불허전’의 한 장면. 타임리프에 따라 21세기에 소환된 허임(김남길)이 최연경(김아중)을 치료하기 위해 침을 꺼내 드는 모습.(사진=tvN 페이스북)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도망간 선조를 대신하여 세자인 광해군이 국내 각지에서 백성을 위무하게 되었다. 이 때 허임이 세자의 침의로 일하면서 전란에 내던져진 백성들의 참상을 목도하게 되는데 이 일이 그의 인생 행로를 결정하게 된 듯하다.

허임의 실력이 출중하여 어지간한 불충 정도는 왕의 심기를 건드릴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럼에도 인조반정 이후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허임은 궁궐에 대한 미련을 접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허임의 행적은 사서에 잘 나타나지 않는데, 가령 1639년 가서야 인조의 병이 낫지 않아 허임이 멀리 공주에서 왕명을 받아 처방전을 써 보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 오래전에 허임은 금강곰나루 인근에 정착한 상황이었다. 신분상승의 기회를 스스로 차단해버린 허임의 결정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허임은 자신의 정체성이 ‘병자를 구하는 의사’임을 부정하지 않았고 자신의 의술을 필요로 하는 무수한 백성들의 처지를 외면하지 않았지요. 그와 같은 소신이 있었기에 임금의 부름을 마다하고 귀촌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플루타르코스는 자신의 ‘영웅전’에서 “테세우스의 묘를 보면 그의 진정한 위대함을 알 수 있다”고 적었다. 그의 묘가 “주인으로부터 도망친 노예나, 권력자들에게 박해당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마지막 피난처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며, “그가 살아서나 죽어서나 모든 사람들을 신분과 출신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허임의 삶과 정신이 이와 같았다. 더불어 그가 수십 년 임상 소견을 집대성해 남긴 ‘침구경험방’은 중화권과 일본을 통틀어 이 분야의 고전으로 받아들여진다. 오늘날 제도권 밖으로 밀려나 명맥을 잇기 어렵게 된 와중에도 묵묵히 허임의 인술을 펼치는 숱한 침의(鍼醫) 분들의 처지가 안타까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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