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진의 청호칼럼

[이코노뉴스 방콕=남영진 논설고문] 오늘 7월 28일은 태국의 국경절인 ‘왕의날’(KING'S DAY)이다. 지난해 10월 서거한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과 시리킷 왕비의 생일은 전국적인 공휴일이지만, 이날은 왕과 왕비의 상징 색인 노란색과 하늘색 옷을 입고 왕실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표시한단다.

▲ 남영진 논설고문

특히 올해 10월까지 1년간 국상(國喪) 기간이어서 마트에서 술을 팔지 않는 등 더욱 자숙하는 분위기다. 전국 관공서와 일반 회사 사무실에도 국왕 부부의 정장 사진이 아직 그대로 걸려있다.

이 독특한 왕실문화가 경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유흥, 식당가를 비롯해 소비가 위축돼 태국 경제가 잘 돌아가지 않고 있다.

1988년 봄부터 일본의 히로히토(裕仁) 국왕이 병석에 드러눕자 정부부터 ‘자숙(自肅)’ 모드로 들어가 1년여간 도쿄의 긴자(銀座), 아카사카(赤坂) 등 유흥가의 술집과 식당에 손님 발걸음이 뜸해져 불황을 겪었던 것과 같다. 일본은 이후 ‘잃어버린 20년’을 맞게 된다.

태국인은 겉보기에는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인들과 비슷하게 좀 검은 피부와 마른 체형인 말레이족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류학자들에 따르면 11세기경 중국 서남쪽인 윈난( 雲南), 광시(廣西) 지방에서 현재의 태국 땅으로 이주한 ‘떠이’(thay)족이 주축이라는 게 정설이다.

이들은 라오스를 거쳐 북부 지역의 창마이, 치앙라이 등을 주축으로 한 ‘란나타이’왕조를 열었다가 버마족의 침략으로 망하고 더 남쪽인 중부 수코타이 지역으로 내려왔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타이’ ‘타야’라는 종족 이름을 사용해왔다.

이후 메콩강 하류의 크메르 종족 등이 계속 이주해 들어와 혼성되었다고 한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와 비슷한 형태의 유적이 방콕에서 2시간 북서쪽 ‘나라이 왕조’의 수도였다는 놉부리 지역에 있다.

한자는 쓰지 않지만 말은 중국어의 평성 거성 입성 등 사성(四聲)이 그대로 남아있어 한국인이 배우기가 어렵다. 태국 말은 라오스 말과 거의 같아 서로 통한다. 라오스는 태국령이었다가 출리룽큰 대왕(라마4세, 영화 ‘왕과 나’의 주인공)때인 19세기 중엽 메콩강 이서 지역을 프랑스에 할양했다.

▲ 태국 승려들과 불교 신도들이 지난해 12월 5일 푸미폰 아둔야뎃 전 국왕의 생일을 맞아 방콕의 푸미폰 다리 위에 앉아 기도하고 있다. 푸미폰 전 국왕은 1927년 12월 5일 생이다. [방콕=AP/뉴시스 자료사진]

이때 프랑스가 하노이와 브양티안을 합쳐 ‘통킹’, 메콩 델타지역인 사이공과 캄보디아의 프놈펜 지역을 합쳐 ‘코친차이나’라는 식민지 나라를 만들었다.

출리룽큰은 서쪽지역 일부는 영국에, 동쪽지역 일부는 프랑스에 떼어주어 왕국을 유지했다. 18세기 아유타야 왕조가 크메르 종족에게 망해 차오프라야 강을 따라 남하해 바다 부근인 방콕 건너편을 수도로 중국계 왕조가 일시 들어섰다가 사라지고 곧 타이계인 차크리왕조가 방콕쪽에 사원과 왕실을 세운 뒤 10대를 이어왔다. 아직도 쌀미음을 ‘쭉’(粥)이라고 부르고 코끼리를 ‘창’(象)이라는 한자발음을 사용한다.

태국인들이 한국인을 12세기 이후 아라비아 상인이 만든 ‘코리아’가 아니라 중국발음인 ‘까오리’로 부르는 것을 보면 중국의 남방민족설이 맞는 것 같다. 16세기 아유타야 왕조이후 국제적으로 ‘시암’(SIAM) 또는 ‘샴’으로 알려졌지만 불경의 원어인 범어로 단순히 ‘나라’라는 뜻이다. 근대이후 ‘타일랜드’라는 영어식 국호가 만들어졌지만 자신들은 종족 이름인 ‘타이’로 부른다.

여기에 인도문화가 큰 영향을 미쳤다. 태국 사원의 대웅전은 석가모니를 모시지만 주위를 보면 열반을 한 태국 고승들의 등신을 동상으로 만들어 모시고 있다. 큰 호텔, 맨션 앞에도 불단이나 탑 안에 신을 모시고 앞에 아침저녁으로 공양을 바친다. 이 신은 불교의 신이 아니라 힌두교의 상징인 코끼리상이 많다. 시바신 비슈누신 등 힌두교의 주요 신들도 태국인들이 일상 섬기는 토속신인 것이다. 힌두교에서는 석가를 ‘시바신의 아바타’로 여기기 때문에 종교적 갈등이 없다.

일부 말레이(Malay) 반도에서 북상한 말레이 민족이 10세기 이후 전래된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 태국 왕실이 수코타이 왕조와 아유타야 왕조시대부터 지금의 말레이시아 반도를 경략해 19세기 중반 영국에 넘겨줄 때까지 점령한 적이 있다.

아직도 말레이시아와의 국경지역에는 태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무슬림들의 테러가 이어지고 있다. 방콕의 관문인 수완나폼 국제공항 북쪽에는 많은 무슬림들이 살아 모스크 사원들에서 하루 다섯 번 기도시간에 스피커를 통해 꾸란(코란)을 낭송한다.

또한 버마 고원지대에서 북부도시 창마이쪽으로 내려온 몽골계가 있다. 태국의 역사는 버마족과 앙코르와트 왕조를 번성시킨 크메르족과의 전쟁역사다. 태국 영화에 긴 창을 휘두르며 코끼리를 타고 ‘기상전’(騎象戰)을 펼치는 장면이 버마와의 전쟁이다.

버마의 주종족인 미얀마족과 북부고원의 고산족이다. 몽골족이 흔히 먹는 ‘창마이순대’(창자에 고기를 넣은 소시지의 원형)나 선지피를 넣고 끓이는 ‘창마이 쌀국수’가 아직도 태국음식에 별미로 남아있다.

▲ 태국 방콕에서 지난해 10월 28일 1250명의 학생들이 카드 섹션으로 서거한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의 모습을 만들어 보이고 있다. [방콕=AP/뉴시스 자료사진]

태국 토속문화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중심답게 중국, 인도, 버마, 크메르족의 문화가 융합된 것이다. 이 융합문화가 왕실을 중심으로 잘 전개되면 종교, 문화 갈등이 없는 좋은 나라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일부 귀족과 군부가 이를 이용해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하면 부패가 만연해 민주주의 선진국이 되는데 장애요인이 될 것이다. 세 달 후인 10월 국상기간이 끝나는 태국은 새 국왕이 군부를 설득해 어떤 정치를 펼지 기로에 서 있다.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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