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의 경제신간 리뷰

[이코노뉴스=김선태 편집위원] “우리가 이 전쟁에서 지는구나. 미군이 뿌린 삐라를 보면 그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어요.”

▲ 김선태 편집위원

“삐라 따위를 믿어? 뭘 읽었는데?”

“내용이 아니에요. 종이를 보면 알아요. 종이가 우리가 쓰는 종이하고는 아예 질이 다른 걸요.”

(한수산 작 『군함도』 2권 332쪽)

소설에서는 아끼꼬가, 영화에서는 이경영(윤학철 역)이 이렇게 말한다. 일제의 패망이 목전에 이르렀는데 그로 인해 일제의 잔혹함은 절정을 치닫는 중이고 영화는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영문도 모른 채 군함도에 갇히는 사람들, 그들을 사지로 내모는 동족들의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그 동족들의 감언이설과, 조선인 아이들에게 학교 대신 공장으로 갈 것을 부추기는 소설의 노래가 완벽하게 겹친다.

꽃도 어리구나, 벗꽃 봉오리.

다섯자 생명을 들어올려서

나라의 큰일에 목숨을 바치는

그건 바로 우리들 학도의 명예.

아아 주홍빛 피가 끓는다.(『군함도』 1권 405쪽)

갓 중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이 이처럼 간악한 꼬임에 넘어가 군수공장으로 전선으로 나아갔고, 마찬가지 방식으로 철저히 속아서 ‘진폐증으로 쿨럭쿨럭 기침을 해대는 징용공들이 누에처럼 꿈틀거리며 잠들어 있는 지옥섬’ 군함도에 내렸다.

▲ '군함도'=저자 한수산, 시리즈 2권중 1권. 창작과 비평사. 2016.5.25. 출간

거대 군수기업 미쯔비시가 장악한 항구도시 나가사끼에서 18.5킬로미터 떨어진 탄광섬 타까시마를 지나 다시 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작은 섬이 하시마다. 이곳에 “물도 풀도 나무도 없이 오직 채탄시설과 광부 숙소만으로 뒤덮인 곳이 미쯔비시광업 하시마탄광” 즉 군함도의 주무대이다. 영화는 류승완 감독이 말한 것처럼 “이미 청산되었어야 했으나 아직 남아 유령처럼 떠돌면서 우리의 미래까지 잡아먹으려 하는” 바로 그곳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청춘남녀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미쯔비시는 애초 일본인 죄수들을 탄광 노동력으로 이용하다 한일합방 이후 조선인 징용공들로 대체했다. 죄수를 다루던 습성에 조선인에 대한 멸시가 더해져 잔혹한 폭력이 횡행한 결과 광부들은 탄광 주 갱도 입구를 지옥문, 거기서 시작되는 지하터널 계단을 ‘목숨계단’이라 불렀다. 계단 꼭대기에서 광부들은 ‘공포의 쇠통 케이지’에 올라 쏟아지듯 지하 700미터 바닥에 떨어져 닿는다. “갱도의 시작이다. 바다 밑 사방 2킬로미터가 넘는 주변에 좌우 앞뒤로 수많은 지하갱도가 뚫려 있다.”(『군함도』 1권 145쪽)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히면 무시무시한 고문이 뒤따르는데 물고문 정도는 신고식에 불과했다.

“키무라가 물에 젖은 수건으로 태복의 얼굴을 쥐어짜듯 완전히 감싸더니 조여대기 시작했다. 숨이 막힌 태복의 몸이 뒤틀렸다. 묶여 있던 태복이 꿈틀대며 의자와 함께 튀어오를 듯 덜컹거리는 순간, 키무라는 태복의 얼굴에서 젖은 수건을 확 벗겨냈다. (…) 콧구멍에 물을 들이붓는 고문이 다섯번 이어졌을 때 태복은 의자에 묶인 채 지하실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사이또오가 그의 옆구리를 걷어차며 말했다. 이 새끼, 이건 아직 시작도 아니다.”(『군함도』 1권 21쪽)

영화 군함도의 인간상은 조선인은 선하고 일본인은 악하다는 이분법적 구성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일제 관리보다 잔인한 조선인 감독관, 기존 영화의 문법에서 종종 무시되곤 했던 이 리얼리티를 류승완 감독은 가차 없이 드러냈다. ‘조선인 가운데 있는 평범한 악인’이 왜 문제일까 궁금했는데, 김민재(송종구 역)의 희번덕거리는 눈빛에 무릎을 치면서 번뜩 느낌이 왔다.

‘악의 평범성’에 대한 고전적인 설명은 한나 아렌트의 노작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찾을 수 있다. 히틀러의 충복 아이히만은 5백만 명의 유대인을 ‘살상’하면서 이를 ‘최종 해결책’이라는 황당한 개념으로 합리화했다. 아렌트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평범한 군인으로 출발했지만 오랜 시간 아리아인의 이상 사회라는 몽상에 빠진 결과 유대인 즉 타인의 입장을 생각할 능력을 상실했다. 문제는 그렇게 되는 누구든 아이히만 또는 송종구처럼 될 수 있으며 다음과 같은 한나 아렌트의 주장을 피해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없는 인간에게 인간성이란 없다.”

▲ 황정민(이강옥 역)이 욱일기를 반으로 가르는 군함도의 한 장면(사진=CGV 제공)

영화의 네 주연들은 역시 명불허전이다. 황정민은 못내 웃기다 끝내 울리고 소지섭은 온통 힘들게 하다 마침내 아프게 하고 송중기는 보는 내내 심쿵하게 만든다. 비교가 무의미하다. 게다가 이정현의 아우라는 한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을 것 같다. 피날레를 장식한 김수안(소희 역)의 눈물 속으로 풍덩 빠져보기를 관객들께 권한다.

뭐니뭐니해도 최고의 장면으로 류승완 감독의 혼이 실린 ‘일장기 노끈’을 들고 싶다. 여담이지만 송혜교가 하시마탄광의 소유자이자 전범기업인 미쯔비시의 광고를 거절한 사실이 새삼 고맙게 여겨진다. 그나저나 결혼을 하면 소심해진다더니 시사회에서 송중기는 “많은 클릭을 부탁한다”며 넙죽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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