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의 경제신간 리뷰

[이코노뉴스=김선태 편집위원] 아이에게 백 가지 명화를 대신할 한 권의 그림책이 소중하듯 우리 사회는 장밋빛 미래상을 떠받칠 아이디어가 절실하다.

▲ 김선태 편집위원

이를 설명해 보고자 김소선 작가의 그림책 ‘구름토끼’ 한 권 그리고 다수의 명화들을 골라 봤다. 구체적으로 ‘구름토끼’에 나오는 각각의 장면마다 그와 유사한 분위기를 가진 명화를 잇대어 소개한다.

그림책과 명화를 함께 보는 아이들이 “와 비슷하다”며 감탄할 것 같고, 그러면서 더 다양하고 더 놀라운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 것 같다는 생각에서다.

그림책의 첫 장면에는 <구름 위에서 자기 키만한 깃털을 들고 까만 눈을 빛내며 서 있는 토끼>가 등장한다.

지금은 이와 유사한 이른바 언밸런스 캐릭터가 범람하는 시대지만 미술사에서 추상화를 이끈 작가들이 종종 신체 균형을 무시한 캐릭터를 그리곤 했다. 그 선구자 격인 파울 클레의 1922년 작 ‘세네치오’를 보여주면 아이는 대뜸 “이게 뭐야?” 했다가 잠시 뒤 묘한 방식으로 둘 사이의 유사성을 설명하려 들 것이다. 이어 1928년 작 ‘고양이와 새’를 보여주면 그 유사성에 친밀감이 더해질 것 같기도 하다.

‘구름토끼’에 다양한 명화를 대입하니

<안경알 속에 보이는, 구름 밖으로 삐죽 드러난 토끼 귀>가 있는 장면은 사실 아이든 어른이든 단번에 찾아내기 어렵다. 쌩 떽쥐베리의 ‘어린왕자’에 나오는 보아뱀 그림이 딱 그렇다. 구름은 안경알 속에만 있고 안경은 드넓은 들판 위에 놓여 있는데 아마도 작가는 이 구도를 잡으려 상당한 고심을 했을 성싶다. 그런데 어딘가에 갇힌 듯해 보이는 구름, 하면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구름이 액자에 둘러싸인 1951년 작 ‘심연’이나 거대한 새에 둘러싸인 1963년 작 ‘대가족’이 대표적이다. 그의 그림을 두고 수많은 해석이 등장하지만 정작 마그리트 자신은 일체의 해석을 거부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실제로 무언가(원문은 ‘테이블’이다)를 그리는 게 아니라 그것이 내게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그린다.”

그 상상력의 힘이 워낙 커서 프랑스의 디디에 반 코뵐라르트는 마그리트의 작품 ‘빛의 제국’을 소재 삼아 한 편의 멋진 소설을 뚝딱 써냈고 국내 작가 김영하는 그 제목을 썼다.

▲ ‘구름토끼’ = 김소선 글그림, 책고래, 2017년 06월 28일 출간

외로움은 혼자 그리기를 숙명으로 여기는 화가들에게 낯익은 소재다. 빈센트 반 고흐는 이글거리는 햇빛 아래에서 외로움을 드러냈고 에곤 실레는 수많은 누드화에, 심지어 연인들의 포옹에까지 외로움을 각인했는데, 아마 이 주제의 압권은 ‘절규’, ‘불안’으로 대표되는 에드바르 뭉크의 그림들일 것이다. 그림책에서 <알록달록한 사탕을 혼자 까먹는 아이가 등장하는 장면>과 뭉크의 1913년 작 ‘하품을 하는 소녀’를 나란히 놓아보자. 아이들은 외로움이 아이에서 소녀로 이어지는 듯 뭉클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사탕 통을 안고 달리는 아이와 그 뒤를 쫓는 토끼들, 그리고 하늘로 길게 뻗은 나무들> 곁에, 그림은 아니지만 기자가 좋아하는 사진 하나를 놓는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1932년 작 ‘생 라자르 기차역 뒤에서’다. 찰나의 순간을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포착했다는 말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이 사진을 보면서, 아이들이 “사진 속 철 문살과 그림 속의 나무들이 묘하게 뒤바뀌는 것 같아요” 하면 감상은 제대로 된 것이리라. 정작 어른들은 철 문살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데.

<아이 몰래 따라 다니느라 숨기 바쁜 토끼들, 그리고 언뜻 보면 아래 위로 널린 듯 좌우로 갈라진 주변 마을 풍경>은 러시아 출신 프랑스 추상화가 칸딘스키의 마을 연작들, 가령 1909년 작 ‘무지개 뜬 무르나우 풍경’과 묘하게 겹쳐진다. 인기척 없는 넓은 길가로 집들이 늘어서 있는 칸딘스키의 그림들 사이에서, 아이와 토끼들이 숨바꼭질하는 기분이다.

<사탕 먹는 아이를 더 가까이서 보려 구름 위에서 날개를 펄럭이며 깡충깡충 뛰어내리는 토끼들>, <각자 하나씩 산봉우리를 차지한 채 무념무상한 표정으로 하늘을 보는 아이와 여러 토끼들>의 모습은 마르크 샤갈을 생각나게 한다. 1918년 작 ‘도시 위에서’나 1938년 작 ‘에펠탑의 신랑신부’ 등 많은 작품에서 샤갈은 마을 위로 익살스럽게 둥둥 떠다니는 사람과 동물을 그려냈다.

▲ <안경알 속에 보이는, 구름 밖으로 삐죽 드러난 토끼 귀>가 있는 장면

<홀로 소파에 앉아 물끄러미 사탕 통을 바라보는 아이, 창틀에 숨어 아이가 잠들기만 기다리는 토끼들, 그리고 새장 안팎으로 서 있는 한 쌍의 새들>. 이 장면들은 프리다 칼로의 ‘원숭이가 있는 자화상’ 시리즈와 제법 닮았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지독한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해 “이런 날들이 계속된다면 차라리 내가 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게 낫지 않을까?” 했던 프리다 칼로. 그녀는 사랑하는 동물들에게 둘러싸인 자신의 그림에서나마 위안을 받고 싶었던 걸까.

‘더 밝은 미래는 더 많은 상상에서’

<아이가 잠들자 조용히 내려가 알사탕을 색깔별로 꺼내는 토끼들, 아이가 행여 달빛에 깊이 잠들까 깃털을 들어 눈을 가려주는 토끼>는 보는 이의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는 장면이다. 외로운 아이가 꿈에서라도 즐거워하고 싶어 한다면, 그 아이의 잠든 모습은 어떨까? 파블로 피카소는 1932년 작 ‘꿈’에서 그 상상을 그려냈다. 달콤한 연인관계를 이어가던 28세 연하의 마리 테레즈가 잠든 모습이다. 원색의 알록달록한 화폭에서 달콤한 꿈을 꾸며 행복해 하는 테레즈를 보면 볼수록 잠든 아이의 표정은 더 슬퍼 보인다.

<저마다 알사탕 하나씩 품은 채, 쑥쑥 자라는 풀잎을 타고 구름으로 올라가는 토끼들> 장면에서 조지아 오키프가 그린 거대한 꽃잎 그림을 보여주면 아이들은 저 엄청난 풀잎과 꽃잎들이 같은 뿌리에서 나온 거라고 우길 수도 있다.

 

<넓은 하늘 양끝에 이어진 사탕 무지개를 바라보는 수많은 토끼들>은 반복된 이미지를 사용한 앤디 워홀의 연작 ‘캠벨 수프’나 ‘마돈나’, ‘마오쩌뚱’ 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수많은 토끼들이 동글동글한 구름 알갱이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살바도르 달리의 1928년 작 ‘소름의 시작’도 연상할 만하다. 살바도르 달리는 달걀 노른자 같기도 하고 유령 같기도 한 알갱이들을 복잡한 기하학적 도형 위에 일정하게 배치하는 방식으로 현실성과 비현실성을 기묘하게 뒤섞었다.

이처럼 적절한 시간과 재료가 주어진다면 우리 아이들은 신나는 상상의 세계로 마음껏 빠져들 것이고, 그것은 틀림 없이 미래 한국 사회의 성장 발판이 되어줄 것이다. 지금 우리 국민들은 촛불 민심이 만들어 낸 민주 정부와 함께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지만 상황은 간단치 않다. 이럴 때일수록 창의력의 중요성은 커지기 마련이며 따라서 더 많은 상상의 단서가 필요하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 김선태 편집위원은 서울대 독어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북토피아 이사, 전 내일이비즈 대표를 역임하는 등 오랫동안 출판업계에 종사해 왔습니다. 현재 휴먼앤북스 출판사 주간과 (사)지역인문자원연구소 선임연구원을 맡고 있습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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