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진의 청호칼럼

[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지금은 참치가 흔하다. 참치회는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먹는 광어 도다리 등과 일반적으로 값이 비슷하지만, 부위에 따라 값이 천양지차다.

그러나 참치캔 덕분에 1970~80년대 캠핑 가서 많이 먹었던 꽁치, 고등어 통조림을 대신할 정도로 대중화됐다. 이제는 기름기가 많고 바다의 최종 포식자의 하나여서 수은 함량이 높다는 이유로 기피할 정도다.

▲ 남영진 논설고문

그런데 언제부터 참치가 흔한 생선이 됐을까? 사실 참치란 생선이름도 60~70년대 이후 쓰였다. 크게 보면 다랑어와 새치 등을 뭉뚱그려 만든 말이다. 딱갈나무 상수리나무 등 활엽수 종류를 참나무로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참치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흑산도 근처에서 잡혔던 뚱뚱한 가다랑어와 참다랑어, 그리고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바다와 노인‘에서 노인이 잡아 배 뒤에 달고 오다 상어에게 다 뜯겨 뼈만 남았던 부리가 삐죽한 흑새치, 돛새치 등을 함께 칭한 말이다.

장약전의 ‘자산어보’에 가다랑어에 대한 설명이 있듯이 우리나라에는 제주도, 흑산도 근처까지 가다랑어가 올라왔다. 방어 고등어 오징어 한치 등 따뜻한 바다에 사는 생선을 먹이로 하기 때문에 비교적 따뜻한 바다에 살았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참다랑어(마구로)를 일본의 남쪽 태평양 근해에서 고래 잡는 방식과 같이 어부들이 배위에서 끈을 단 작살을 던져 찍어 잡는 장면을 TV에서 본 적이 있다.

참치가 우리의 식당과 식탁에 자주 오른 것은 사실 80년대 중반 이후였다.

박정희 시대 말기인 77, 78년에 통일벼가 보급돼 단위 생산량이 급증해 쌀밥의 포원을 해결할 수 있었다.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3저 호황으로 쇠고기, 돼지고기를 수입하면서 고기를 구워서 먹는 풍습이 대중화됐다.

이 고기구이 유행이 10년도 안 돼 동물성지방 과다섭취로 인한 성인병, 비만에 대한 경고가 언론에 나타나면서 직장인들의 회식 장소도 바닷고기 횟집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가장 흔한 생선이 아나고회, 오징어회, 그리고 광어와 가자미회였다.

80년대 중반쯤엔 ‘유진참치’라는 참치횟집이 등장했다. 냉동된 하얀 살이 차갑고 딱딱해 김을 싸서 먹었다. 이후 동원참치에서 해동기술을 일본에서 도입해 살살 녹는 마구로 뱃살을 지금도 김에 싸서 먹는 버릇이 이어지고 있다.

이 참치를 60년 전인 1957년 처음 잡은 배가 지남(指南)호다. 대한민국 제1호 원양어선이다. 심상준씨가 만든 제동산업에서 운영하던 어선으로 1957년 6월 윤정구 선장(90)이 인도양에 나가서 참치를 잡는데 성공했다.

▲ 지난달 29일 부산 영도구 국립해양박물관에서 열린 우리나라 원양어업 진출 6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귀빈들이 기념 조형물 제막식을 갖고 있다./해양박물관=뉴시스 제공

항상 남쪽을 가리킨다는 지남철같이 망망대해를 헤쳐 나가라는 이승만 대통령이 붙인 이름이다. 지난 6월 29일이 부산항을 출항한 60주년이어서 당시 윤 선장과 이재호 어업지도관(89)이 훈장과 표창을 받았다.

1946년 미국 정부가 오레곤주 아스토리아(Astoria) 항에서 만든 종합시험선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정부수립 다음해인 1949년 미국 원조자금으로 들여왔다. 당시에는 해상순시선 겸 제주도 출장용으로 활용되다 6.25전쟁 이후 부산~제주~여수 간 의약품 수송 업무를 담당했다.

제동산업이 51년 인수해 어선으로 전용했다. 이 배는 트롤어업, 연승어업, 선망어업 등의 복합적 기능을 갖고 있었고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냉동·냉장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처음에는 연근해 어업에 활용되다 1957년 드디어 원양어업 시험조업 출어를 하게 된 것이다.

심상준 사장은 이 원양어업에 성공해 주로 참치를 일본에는 횟감으로, 후에 미국에는 통조림용으로 수출해 돈을 벌었다. 64년 한국수출산업공단 이사에 이어 72년에는 한국수산개발공사를 인수, 10여년간 대표이사를 거쳐 86년까지 사료회사인 퓨리나코리아 회장을 지냈다. 원양어업의 개척자이자 식품산업개발에 선구자였다.

이 지남호 첫 출항때 23세의 실습항해사로 승선해 3년 만에 선장이 된 사람이 동원그룹의 김재철 회장이다. 그는 젊은 나이에 원양어업에 뛰어들어 참치는 수출하고 같이 잡은 꽁치와 오징어를 60년대 국내에 들여와 국민들에게 단백질과 동물성 지방을 보급했다.

박정희 정부가 1966년 수산청을 만들어 수산진흥정책을 펴자 69년 서울 명동에 3명의 직원을 데리고 동원산업을 세웠다. 그는 이해 일본에서 참치연승선 제31동원호와 33동원호 두 척의 배를 현물 차관 형식으로 빌려 사업을 시작했다.

▲ 우리나라 첫 원양어선인 지남호를 20분의 1로 축소한 모형/해양박물관 제공

73년 아프리카 가나항구에 첫 해외 기지를 만들고 라스팔마스 어장에 뛰어들었다. 76년에는 부산에 동원냉장(주)을, 81년에는 동원식품(주)을 세워 82년에 국내 최초로 참치통조림을 출시했다. 83년 동아제분과 해태가 후발주자로 참치통조림 시장에 진입하면서 3사 제품이 이른바 ‘참치 전쟁’을 벌였다.

동원은 85년 시장점유율 85%로 참치캔 시장을 주도했다. 진출 30년만인 이때부터 우리나라 참치 원양어선들이 피지 바누아트 솔로몬제도 등 남태평양을 누비며 일본을 제치고 1위에 올라섰다. 우리가 쉽게 즐기는 참치도 나름의 사연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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