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이민주 버핏연구소 대표] 세속의 성공을 꿈꾸는 미국의 능력 있고 야심만만한 젊은이들은 뉴욕 맨해튼의 월스트리트 입성을 꿈꾸게 마련이다. 돈이 흐르고, 음모와 야망이 넘치고, 일확천금이 실현되는 꿈의 거리가 월스트리트이다. 지금도 미국을 넘어 세계의 야심 있는 젊은이들은 부나방처럼 월스트리트로 몰려든다.

▲ 이민주 버핏연구소 대표

소도시나 지방의 야심 있는 젊은이들은 일단 뉴욕으로 '올라오면' 고령이 돼서야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일반적이다. 뉴욕에는 성공의 기회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라는 한국 속담은 미국에서도 적용된다.

그런데 워렌 버핏(87)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은 한창 젊은 시절 월스트리트 생활을 접고 귀향했다. 일시적 이주가 아니라 삶의 기반을 아예 인구 10만여 명의 소도시인 네브래스카주 오마하로 옮긴 것이다.

버핏의 행복한 월스트리트 생활은 1956년에 전환점을 맞았다. 그해 벤저민 그레이엄이 고령을 이유로 30여 년간 운영해 온 '그레이엄 뉴먼'의 문을 닫고 주식 투자 현업에서 은퇴했다.

버핏은 평생 그레이엄을 최고의 스승으로 모셨다. 버핏은 흔히 가치 투자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레이엄에 대해 ‘내 인생의 나침반’이라고 찬사를 보낼 만큼 경의를 표할 정도였다.

당시 62세였던 그레이엄은 만족스러운 여생을 보낼 수 있는 돈을 벌었던 터였다. 그는 은퇴와 함께 동부의 비버리힐즈로 거주지를 훌쩍 옮겼다. 이제 버핏은 어떤 선택을 해야 했는가. 상식적이라면 그는 월스트리트에 그대로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런데 26세의 야심만만한 젊은이는 왜 고향으로 돌아왔을까?

"내가 네브래스카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이곳이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네브래스카의 전문화한 기업 환경은 어떤 형태의 사업이건 진정한 의미에서 경제적 타당성을 보장해 준다. 또 이미 잘 알려진 대로 네브래스카의 특징인 맑은 공기와 낮은 범죄율, 좋은 학군, 그리고 중서부 지방 특유의 직업윤리 등 더할 나위 없이 완전한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 지난 3월 8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한 여성이 '겁없는 소녀상'과 똑같은 포즈를 취해 보이고 있다. 【뉴욕=AP/뉴시스 자료사진】

버핏은 1996년 8월 오마하 지역 신문 「오마하 월드 헤럴드」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는 의례적인 표현으로 보인다. 당시의 다른 발언을 찾아보면 그는 월스트리트 주식시장의 변덕과 광기에 염증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내면의 가치를 중시하고 내향적인 성격을 가진 그가 월스트리트의 말초적이고 표피적인 인간관계에 불편함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확실한 것은 버핏이 세속의 기준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귀향한 버핏은 투자자를 모았다. 1956년 5월 1일, 오마하에서 투자 파트너 회사인 '버핏 어소시에츠(Buffet Associates)'를 설립했다. 4명의 가족과 3명의 친구에게서 투자받은 10만 5,000달러에 버핏이 100달러를 보태 모두 10만 5,100달러의 종잣돈이 만들어졌다. 전설의 투자 기록이 만들어지는 출발점이었다. 그는 투자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운영 원칙을 공개했다.

‒ 적당한 가격의 주식을 찾아 기꺼이 투자한다.

‒ 미 재무부 채권(국채) 수익률인 6%를 넘어서는 수익률을 올리지 못하면 버핏은 단 1%의 수수료도 받지 않는다.

‒ 버핏이 받는 연간 수수료는 전체 수익률 중에서 미 재무부 채권 수익률인 6%를 제외한 수익의 25%이다.

‒ 투자자들은 버핏의 투자법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 투자자들이 질문을 해 와도 버핏은 대답할 의무가 없다.

‒ 버핏은 1년에 한두 번만 새로운 종목에 투자한다.

준비된 ‘투자의 귀재’ 버핏의 성공은 이 같은 자신감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 이민주 대표는 서울대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퍼듀대에서 MBA(경영학 석사)를 받았습니다. I.H.S버핏연구소를 설립해 투자교육 및 기업교육 전문회사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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