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진의 청호칼럼

[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6월이 호국보훈의 달인 것은 알고 있지만 1일이 의병의 날이란 건 잘 모른다. 6월 6일 현충일과 6월 25일 한국전쟁 기념일 같이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기리는 것은 당연하다.

420년전 임진왜란의 끝물인 정유년의 7번째 육십갑자인 올해 ‘의병의 날’이 새롭다. 특히 북한핵과 경북 성주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배치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대립이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는 때라 더욱 그렇다.

▲ 남영진 논설고문

역사가들은 대체로 “임진왜란은 수군의 이순신 장군 외엔 관군이 이긴 전투가 거의 없었다. 각지의 의병과 승병들이 산발적으로 국지전을 벌여 왜군을 묶어놓고 명나라 군대의 도움으로 겨우 나라를 지킨 전쟁”으로 평가한다. 육지에서 관군이 싸운 건 권 율 도원수의 행주산성 대첩과 진주성에서 김시민 장군이 왜군의 공격을 막아낸 싸움이 전부였다. 각지에서 병마사, 부사, 현감 등 관군들도 의병들과 연합전을 펼쳐 싸웠다.

최근 영화 ‘대립군’(代立軍)은 선조로부터 분조(分朝)를 허락받아 함경도와 평안도를 종횡무진 했던 광해군이 주인을 대신해 병역에 끌려나온 머슴 출신들을 데리고 왜군과 싸우는 내용이다. 역사적 고증은 없는 픽션이지만 함경도로 도망간 형 임해군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군에 잡히자 동생인 광해군이 각 지역의 의병들을 독려해 싸웠다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 양반 출신의 의병장 휘하에 일반 백성과 노예 출신들이 많았다. 개전 초기인 1592년 5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선발군이 천혜의 방어지인 문경새재를 무사통과하자, 신 립 장군이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막다가 관군이 전멸했다. 후에 주변 지역인 문경 점촌 예천 등지의 노비들이 의병을 만들어 조령을 점령해 왜군의 출입을 막아 왜군들의 소통과 보급에 차질을 주었다.

이 공로를 인정해 영의정이었던 서애 유성룡이 이들을 면천시켜 다른 노비들의 사기를 진작시켜 주자고 건의했으나 안됐다. 선조와 함께 의주로 도망간 양반 귀족들이 이들의 공로를 인정해 노비에서 풀어주면 자신의 노비들이 동요할까봐 반대한 것이다.

1일을 의병의 날로 정한 것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가 경상도 의령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음력 4월 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것이다. 2011년 제1회 의병의 날 기념식이 경남 의령에서 개최됐다. 곽재우는 1552년(명종7년) 8월 28일 외가인 의령에서 태어났다. 훗날 그가 의병장으로 활동한 주요 지역이 어릴 때 자랐던 바로 의령이었다.

그는 1585년(선조 18년) 32세 때 별시에서 2등으로 급제했지만 선조는 곽재우의 답안에 불손한 내용이 있다고 별시 합격을 모두 취소시켰다. 이후 이듬해 8월 6일 아버지가 죽자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의령 동쪽 남강과 낙동강의 합류 지점인 기강 근처에 정자를 짓고 낚시를 하며 지냈다.

▲ 지난 4월 22일 경남 의령군에서 열린 ‘제45회 의병제전’ 퍼레이드에서 참가자들이 시가 행진을 하고 있다./의령군=뉴시스 자료사진

은거한 지 4년째 1592년 왜군이 침략할 때 곽재우는 40세. 나라가 위기에 빠지자 지체 없이 행동에 나서 재산을 내놓아 의병을 모았다. <선조실록>에는 곽재우의 집안은 대대로 매우 부유했는데 재산을 모두 의병을 모으고 병기를 마련하는데 써서 수하에 장사들이 상당히 많았고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고 기록돼 있다.

곽재우는 의병을 일으켜 여러 전투에서 붉은 옷을 입고 지휘해 ‘홍의장군’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北京)에 갔을 때 명나라 황제가 하사한 붉은 비단 옷을 입고 전쟁에 나간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함께 왜군에 혼란을 주기 위해 붉은 옷을 부하 여러 명과 똑같이 입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노비 10여명으로 시작된 곽재우의 부대는 승전을 거듭해 후에 2000명까지 늘어났다. 주로 낙동강 지류인 남강 일대를 중심으로 중요한 전공을 세웠다. 특히 영남에서 호남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암진(의령과 함안 사이를 흐르는 남강의 나루)을 지켜 왜군이 곡창지대인 호남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았다.

곽재우는 지리상의 이점을 이용해 위장, 매복전술 등의 변칙적인 유격전으로 적을 교란해 승리했고 이 전공으로 곽재우는 정식 벼슬을 받아 계속해서 승진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년 만에 그는 경상우도 방어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는 군사 지휘관에 올랐다. 후에 공신 책봉에서는 빠졌지만 용맹하고 고결한 명성은 높았다.

▲ 경남 의령군 정암마을 인근 곽재우 동상/뉴시스 자료사진

곽재우는 전쟁 6년째인 1597년 8월 계모 허씨가 별세하자 고향인 경상도 현풍에서 장사를 지낸 뒤 울진으로 피신해 삼년상을 치뤘다. 다음해인 1598년에 임진왜란이 끝났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선조가 3년 동안 유배를 보냈고 선무공신 책봉에도 제외됐다.

선조가 이순신의 전공과 명성을 시기해 삭탈관직한 뒤 뒤에 전세가 불리하자 백의종군시킨 것과 비슷하다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한 후 1610년 곽재우는 오위도총부 도총관(정2품), 한성부 좌윤(종2품)으로 올라 잠깐 상경했다가 곧 낙향해 현풍에서 죽었다. 하지만 최초 의병장의 명성이 높아 잠깐 한양관직에 있는 동안 곽재우를 만나기 위해 사람들이 집에 몰려들었고 그가 나들이 할 때는 아이들로 거리가 가득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의 애국심이 일반 국민의 그것보다 못 미치는 것 같다.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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